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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속살, 동부 티베트를 훔쳐보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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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26면

1. 1년에 한 번 열리는 말타기 경주시합.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풍요로운 축제다.

반경 300㎞ 안에 우리나라의 모든 것은 담겨 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차를 달리면 한나절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멀다’고 느끼는 우리의 거리 감각은 결국 600㎞를 넘지 못한다.
이보다 더 먼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선 서울∼부산을 몇 번 왕복했느냐의 환산이 편할지 모른다. 중국 서부의 일부분을 돌아본 거리인 3000㎞, 서울∼부산을 얼추 3회 왕복한 거리다. 여기서 속도는 문제되지 않는다.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남아 있는 거리는 또 그만큼 펼쳐져 있는 탓이다.
‘넓다’와 ‘멀다’는 것. 이는 맨땅을 밟아보지 않으면 상상하지 못한다. 끝없이 펼쳐진 길, 아니 길 없는 길도 있으니 그 연장의 끝은 영원과 통할지 모른다. 열흘을 꼬박 달려 이동한 3000㎞에 질려버린 난 좀스러운 한국인이다.

느린 걸음, 풍부한 생각

원래 칭하이성의 거얼무를 거쳐 티베트 라싸까지 돌아볼 계획이었다.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무지를 깨닫는 데 닷새가 걸렸다. 갈림길에서 달려온 거리의 세 배를 더 지나야 닿을 수 있는 라싸는 이번에도 나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빠른 포기와 제약은 때론 약이 된다. 라싸 대신 동티베트의 속살을 여유 있게 돌아볼 기회가 생겼으므로. 속 터지는 배기량 1000cc 자동차의 느린 속도도 고마워해야 한다. 생각의 속도만큼 펼쳐지는 풍광과 차창으로 들어오는 라벤더 향기를 덤으로 받았다.
칭하이성 북서부는 원래 티베트의 땅이다. 티베트 자치구에서 분리되어 중국에 편입된 지역은 주로 산으로 둘러싸인 불모의 사막과 초원, 소금기 많은 습지와 호수가 널려 있다. 양쯔강과 메콩강은 이곳에서 발원해 중국 동부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젖줄 역할을 한다.

2.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라마사원. 3. 거리를 활보하는 이의 절반은 라마승이다. 4. 한껏 멋을 내고 나들이에 나선 장족 처녀들.

칭하이성의 대부분은 해발 3000m 이상의 고원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염소나 양, 야크를 방목하며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시가지엔 여러 인종이 모여 살고 있다. 티베트 전통 의상을 걸친 티베트족, 이슬람교를 믿는 카자흐스탄계의 회족, 몽골족, 한족들…. 이들이 어울려 이루어놓은 마을엔 탈초가 흩날리는 라마불교 사원과 뾰족탑의 이슬람 모스크가 함께 있다.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인간들은 각자의 신을 향해 독경과 코란을 낭송하곤 한다.
거리엔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과 진흙에 야크 똥을 이겨 만든 흙집이 공존한다. 번듯한 건물은 한족, 구차한 모습의 집들이 티베트인들의 거주지임은 처음 보는 사람도 다 안다. 도시의 상권과 권력을 모두 쥐고 있는 한족 이외의 구성원들은 그저 거주민에 불과할지 모른다.

동화되지 못하는 인종 간의 불화는 거리의 음식점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쓰촨식 요리 간판을 내건 한족의 식당, 양고기와 난을 구워 파는 회족 식당, 정체를 알 수 없는 길거리 요리까지. 그들의 입맛은 백 년을 더 함께 살아도 각자의 선택을 고수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전 세계의 어떤 음식도 소화해내던 나의 위장은 고산증 증세와 함께 입맛을 잃었다. 해발 3000m쯤에서 슬슬 일어나는 고산증, 이는 체력과 여행경력과도 상관없으며 나이의 많고 적음과도 관계가 없다. 산소 부족으로 인한 신체적 증상은 인간의 의지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킨다. 두통과 호흡곤란을 동반한 극도의 무기력증이 그 증세다.

자연의 극복이 생활방식

쓰촨성으로 방향을 돌리자 GPS의 고도계가 4000m를 넘었다. 고소의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해결방법은 오직 하나. 물을 많이 마시고 즉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는 방법이 전부다. 시간에 쫓기는 일에 익숙한 한국인이 이를 지킬 리 없다. 이를 악물고 참아본다. “갈 길은 먼데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내가 주장했던 말도 안 되는 이유다.
서너 시간을 더 무리해 올라간 우수두바에서 난 결국 쓰러졌다. 티베트인이 경영하는 여인숙에서 난 링거 주사를 맞고서야 깨어났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주사까지 맞으며 가야 하는 여행, 바로 티베트행이다.
쓰촨성의 간쓰를 지난다. 활기찬 시장이 들어선 거리는 현란한 색채와 문양으로 장식한 티베트식 건물이 늘어서 있다. 집의 앞모습만 본다면 라싸나 네팔 카트만두 시내의 그것과 분간이 되지 않는다. 최근 외국인에게 개방된 이 도시는 쉐르시와 캉딩, 혹은 더거로 가는 길목이 되어 용감한 여행객들을 가끔 볼 수 있다. 푸른 눈의 독일 아가씨와 오랜만에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인사를 나눈 것도 간쓰의 구멍가게 안에서였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라마승이다. 붉은색 가사를 입은 승려의 숫자가 여느 지역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주변에 500년이 넘은 큰 라마사원인 간쓰쓰(가르제곰파)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혼자 거리를 걷는 노승에서부터 조그만 차에 열 명이 넘는 젊은 승려와 천장에 짐을 가득 실은 광경은 이곳만의 진풍경이다. 티베트인에게 종교는 생활 그 자체일지 모른다.

일 년에 한 번 열린다는 말타기 경주 시합을 보았다. 인적을 찾기 힘든 너른 초원에 수백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모인다. 출발점이 보이지 않는 녹색의 대지에서 달려온 말들이 질주한다. 숨 가쁜 말의 콧김과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달리는 아이들의 웃음이 섞인다.
말 잔등에 그냥 올라타본 적이 있는 난 이 경기를 왜 하는지 안다. 용기와 담력이 얼마나 큰지 시험하는 것, 그 고통을 극복한 이에게 돌아갈 영광을 칭찬해주는 의식인 것이다. 티베트인의 생활방식은 자연의 극복이란 지점에서 그 근원을 설명할 수 있다.

경기장 주변은 축제와 작업(?)의 장이다. 모처럼 멋을 낸 처녀들을 무더기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동네 청년의 눈길과 음험한 미소도 용서되는 날이다. 오늘을 놓치면 재회의 시간은 기약할 수 없는 절박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텅 빈 초원이 사람과 말로 꽉 채워지는 풍요의 축제, 이날을 위해 일 년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인내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티베트의 반쪽을 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여긴 여행허가서도 필요하지 않으며 귀찮은 공안의 질문공세도 없다. 청두나 시닝에서 차량을 렌트해 들어가면 만사 OK다. 여기서 만날 수 있는 무공해 고원의 풍광과 엄청난 높이의 산, 신선한 공기와 해맑은 소년의 웃음,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의 진풍경은 들인 수고를 몇 배로 보답해준다. 단, 여행사를 기웃거려 모든 걸 해결하는 사람에겐 아직 문호가 개방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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