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로 얼룩진 '공룡 농협' 회장은 뇌물 받고 … 여직원은 공금횡령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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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을 위한 금융기관을 표방한 농협이 비리로 얼룩지고 있다. 20일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이 사옥 부지 매각과 관련해 현대자동차로부터 3억원을 받은 혐의에 유죄가 인정돼 법정구속됐다. 1988년 선출직으로 바뀐 뒤 뽑힌 역대 회장 3명이 모두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것이다. 강원도 평창의 한 농협 여직원은 '명품' 중독에 빠져 12억원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회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앞다퉈 부정을 저지른 셈이다. 농협 안팎에서는 자산 156조원에 이르는 "공룡 같은 조직임에도 내부 감시.감독 체계가 허술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대근 회장 5년형 … 법정구속
사옥부지 팔며 3억 받아
항소심, 무죄 판결 뒤집어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윤재윤)는 20일 현대자동차 측으로부터 3억원을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로 기소된 정대근(63.사진) 농협중앙회장에게 징역 5년 및 추징금 1300만원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1심 재판부는 "농협 임직원을 준공무원으로 볼 수 없어 공무원에게만 적용되는 뇌물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었다.

하지만 항소심은 "특가법이 농협과 같은 정부관리 기업체 임직원을 준공무원으로 보는 것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 돈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는 취지"라며 "농협법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국가가 농업 발전을 위해 농협에 대한 적극적인 지도 감독을 했다고 보인다"고 특가법상 뇌물죄를 적용한 이유를 설명했다.

특가법 4조 1항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업체(정부관리기업체)의 간부직원은 형법 적용에 있어 공무원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시행령에 농협중앙회 및 그 회원 조합을 정부관리기업체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재판부는 "정 회장이 농협에 구체적인 피해를 준 것은 없지만 뇌물죄는 돈 받은 것 자체로 성립하며 3억원이라는 거액을 호텔 밀실에서 받은 것은 어떤 정황을 고려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2005년 12월 서울 양재동 농협 하나로마트 부지 285평을 현대차에 파는 대가로 현대차 김동진 부회장으로부터 현금 3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현대차는 양재동 사옥을 증축하기 위한 추가 대지를 확보하려고 인접한 하나로마트 부지를 사들이려 했다.

정 회장은 문제가 불거지자 3억원 중 대부분을 되돌려 줬다. 뇌물 공여 혐의로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김동진 부회장에 대한 선고공판은 31일 열린다.

박성우 기자

'명품 중독' 한 여직원 12억 빼돌려
옷·시계·목걸이 1000점 평창경찰서 영장 신청

농협중앙회 평창군지부 평창군청출장소에 세금수납 업무를 담당하는 나모(26.여)씨. 그는 루이뷔통. 프라다. 구찌 등 소위 명품 가방과 구두 60여 점씩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방에는 900여 벌의 옷과 시계, 목걸이, 벨트 등 각종 명품 1000여 점이 꽉 채워져 있다. 계약직 직원으로 월급이 180여만원인 나씨는 출장소에서 돈 수납 일을 하면서 세금 등 공금을 빼내 이런 명품으로 몸 치장했다.

강원도 평창경찰서는 20일 출장소로 들어오는 세금을 포함해 3년 동안 모두 12억5000만여원을 횡령, 고가의 명품을 사거나 생활비로 유용한 혐의로 나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나씨는 2004년 6월 14일 평창군으로부터 조달사업회전자금 300만원을 강원조달청으로 보내달라고 의뢰받았으나 입금하지 않고 가로채는 등 올 7월 12일까지 44회에 걸쳐 12억5580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다. 나씨가 횡령한 돈 가운데는 평창군청이 정부에 낼 국세도 포함돼 있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 조사결과 나씨는 납기일 전에 평창군청이 입금해 줄 것을 의뢰한 돈을 가로챈 뒤 납기일에 맞춰 들어온 다른 돈으로 메우는 등 '카드 돌려막기' 식으로 돈을 빼낸 것으로 드러났다. 나씨는 처음 업무 과정에서 1000만원의 결손금이 발생하자 이를 조달사업자금으로 메웠는데, 별 탈이 없자 본격적으로 돈을 횡령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씨는 원주와 서울 백화점을 돌며 자신 월급의 3~4배나 되는 고가의 명품을 사들였다. 구입한 옷은 의류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방을 가득 메웠다. 명품 중독에 빠지면서 범죄 횟수가 늘고 횡령 액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경찰은 "나씨가 명품 구입에 중독된 것 같다"며 "고가의 명품 수집을 위해 돈이 계속 필요해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나씨가 명품 구입 외에도 상당한 돈을 쓴 것으로 보고 사용처를 조사하고 있다. 또 농협 직원을 상대로 공범 여부를 수사하는 한편 군청의 공과금 징수 공무원들이 미납 공과금을 확인하지 않는 등 직무유기 혐의가 있는지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평창=이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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