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포착」 안개에 젖은 김대중 전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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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개혁태풍 우회” 귀국연기 고려/“국민눈길 끌기 어려울때 돌아가면 득없다”/6월 예정 바꿔 반년쯤 더… 장기체류 채비
김영삼대통령과 30년간의 숙명적 대결끝에 지난 1월초 영국으로 홀연 떠났던 김대중 전민주당대표가 당초의 6월 귀국계획연기를 고려하고 있다.
김 전대표는 당초 대선패배의 후유증을 씻으면서 너무 잊혀지지 않을 시점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 김 전대표가 최근 『한 6개월쯤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측근들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김영삼대통령이 재산공개 등 예상을 훨씬 앞지르는 개혁정책으로 국민의 인기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그의 귀국을 미루게 하는 주요 요인인 것으로 민주당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김 대통령이 주도하는 국내정국이 지금대로 간다면 6월에 돌아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권노갑최고위원을 비롯,한화갑·김옥두·최재승·남궁진의원 등 동교동 직계들이 대충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김대중선생이 귀국해봐야 현재로서는 마땅히 설 자리가 없고 오히려 이미지만 떨어질 뿐』이라고 실토했다.
동교동측근들은 김 전대표가 국내에 있으면서 마냥 「YS개혁」에 박수만 칠수도 없고 그렇다고 개혁이 미흡하다고 딴죽을 걸 분위기도 아니지않느냐는 것이다. 김 대통령측이 DJ에게 『구시대청산을 위한 개혁실천에 협력해달라』고 하거나 「양김회담」을 제의해오면 거절하기도 어려울 것이란 점이다.
동교동직계그룹은 최근 『개혁태풍이 좀 잠잠해질 올 겨울이나 「YS개혁프로그램」의 메뉴가 고갈될 1∼2년뒤쯤 귀국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지난달 하순에는 영국을 방문한 김 전대표의 장남 홍일씨와 탤런트 정한용씨·김대성비서실차장이 국내정세를 김 전대표에게 소상하게 보고한바 있다.
또 현재 영국에 체류중인 박영숙 전최고위원,문희상의원,조승형 전비서실장 등이 최근의 국내소식을 자세히 보고했다. 이에 따라 김 전대표가 「귀국시기」를 재고하기 시작했다고 정통한 소식통이 밝혔다.
동교동직계들은 8일 권노갑최고위원이,17일에는 김옥두의원이 영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비슷한 건의를 할 것으로 보인다.
측근들은 김 전대표의 귀국이 가져다줄 정치적 의미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그는 지난 73년 일본 동경 팔레스호텔에서 정보부요원들에 납치돼 귀국함으로써 정치판을 한번 뒤흔들었다.
이어 80년 「5·17」후 2년여간 복역끝에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됐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85년 2·12총선직전에 귀국,신당돌풍을 일으킴으로써 「화려한」 귀국을 기록했다.
지난번 대선패배후 영국행도 과거와 같은 정치적 반전을 기대하고 떠난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대통령의 개혁태풍은 DJ에게 쉽사리 반전의 기회를 제공할 것같지 않다는 것이 현재의 분위기다. 여기에 동교동계의 고민이 있다.
일부 동교동인사들은 대선때 김 전대표를 지지해온 8백만명의 「연민」이나 「정」을 떨어뜨릴 「초라한 귀국」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고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당의 향후 입지에도 타격을 주지않을까 크게 우려하고 있다.
김 전대표는 최근 「EC통합과 독일통일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집필활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 동교동직계의원은 『귀국이 늦춰질 경우 현재 진행중인 연구·저술에 좀더 많은 정력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대표는 전문가들이 주제의 「고난도」를 이유로 연구를 만류했지만 최근 EC통합과 독일통일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착수,이미 「장기체류」를 「결심」한듯 하다는 것이다. 그가 최근 한사코 사양해오던 일본 NHK의 김대중일대기 제작에 응하기로 한 점도 조기귀국을 단념한 것이 아닌가 추측케한다.
지난달 20일에는 김윤환민자당의원이 영국에 간김에 만나자고 했으나 『만날 일이 없다』고 고사하고 20여분 전화통화만 했다. 그때 김 전대표곁에 있던 김대성비서실차장은 『허주(김윤환)가 김 대통령이 보내서 왔다고 한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국내에서는 궁지에 몰린 민정계의 중진인 김 의원이 DJ를 만나려고 한 것을 두고 『내각제 등 향후 정계개편문제를 논의하려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김 전대표도 이런 오해의 가능성을 의식해 김 의원의 면담 청을 뿌리쳤다고 한 측근은 말했다.
김 전대표는 오는 29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개최되는 「세계지도자회의」에 현직대통령 4명,IMF전무 등과 함께 코바르 실바 포르투갈대통령의 초청으로 참석한다.
그는 리스본에서 자신의 미국내 사조직인 「인권문제연구소」 책임자 이영작박사(대선당시 특보·미 체류중)를 만나 일정을 협의한뒤 교포초청형식으로 6월초 미국을 방문할 계획을 잡아놓고 있다.
IPU회의 참석도중 리스본에 들르게 될 손세일·조순승의원과도 만나 국내상황에 대해 깊이있게 토론한다는 구상. 이기택대표도 6월초 독일·영국방문전 미국에 들러 김 전대표와 「접촉」할 예정이다.
김 전대표는 요즘 북한핵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앞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할 뜻을 더욱 굳히고 있다』고 방문객들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들은 「국민봉사」가 현실정치보다는 학문연구를 통해 국민을 계도하는 쪽의 의미로 봐야할 것이라고 분석했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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