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민원 앞장서는"해결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노사분규 현장이라면 언제어디서나 감초처럼 끼어드는「 노동경찰관」- .팽팽히 맞서있는 노사양측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맡고있는 근로감독관들이다.
노동부 소속 주사(6급)·주사보(7급)인 이들은 실제 사법경찰권이 주어져있어 노동관계법규 위반행위에 대해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각 지방 노동관서의 근로감독관 사무실에 가보면 고발인 근로자나 피고발인 사업주 등을 신문하거나 타이프 라이터를 두드리며 조서를 꾸미는 모습이 마치 경찰서 조사계와 흡사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들 스스로는 사건의 수사보다 노사양측의 첨예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임금체불·부당해고 등 근로자의 민원처리에 역점을 두는 「노동 해결사」를 자처하고 있다.
이들의 업무는 성격상 법만으로는 처리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해결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근로자들의 가장 많은 민원인 체불임금 문제만해도 칼로 베듯 사업주를 단죄할 수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주로 영세 하청업체의 체불 임금건을 접수받아 현장조사해 보면 사업주의「비양심」보다는 하청을 준 업체들이 납품대금을 몇달짜리 어음으로 떼어주는 관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빚어지는 임금체불이 적지않다. 이릴 경우 법적 처리는 무의미하다.

<법적처리엔 한계>
추석등 명절이면 으레 생기는 체불임금 분규때도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받아주는것이 급선무이므로 사업주를 처벌하기보다 끈질기게 설득하는 일에 매달리기 일쑤다.
근로자의 질병민원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의 질병이 업무와 관련된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근로자가 사업주를 고발하는일이 많으나 진단결과 업무상 질병이란 뚜렷한 확증도 없고 그렇다고 그 반대의 단정도 어려운 상황에서 근로감독관은 고심할 수밖에 없다. 이때는 회사측을 비인간적으로 설득해 치료비를 부담토록 조정한다.
노동부의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에 따르면 이들이 해야할 일은 엄청나게 많다.
일상적인 업무만도 임금교섭, 최저임금제 실시, 근로시간 준수 및 근로복지 후생실태, 노조업무와 노사협의회 운영등에 대한 지도·감독등.
또 각종 노동관련법규 위반 행위의 고소·고발, 인지·진정사건을 수사해야 하고 노동관련 질의·회시업무도 맡는다. 근로기준법등의 위반행위를 사전에 예 하거나 이를 시정시키기 위해 각 사업장을 정기·수시로 나가 기숙사등을 살펴보고 취업이 곤란한 질병여부를 가리기위해 근로자들을 검진하기도 한다.
여기에다 외국에선 통상분리 운영되고 있는 노사분규때의 노사조정업무는 근로감독관들에게 가장 신경쓰이는 업무가 아닐 수 없다.
통상 3월 중순이면 임투(임투) 에 대비, 「24시간 비상근무」에 돌입한다. 노사가 첨예하게 맞 부닥친 이해관계의 틈바구니에서 자칫 노측으로부터는「업주의 앞잡이」정도로 매도되고, 사측으로부 터는 『근로자들보다 한 술 더 뜬다』는 반발을 사기도 해 고충을 겪기도 한다.
지난해 5월 경기도 부천 경인유리 노사분규때에는 조정차 나갔던 부천사무소 전조술 근로감독관(40)이 근로자 50여명에게 집단폭행당하기도했다.
전씨는 이 회사 노조가 인사징계위의 노조참여등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하고, 곧이어 회사가 직장폐쇄에 들어가는등 분규의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자 매일회사에 들러 타협점을 모색하다 이같은 봉변을 당했다.
당시 폭행노조원들은 전씨가 근로자들의 일방적인 양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한다고 오해했다.
전씨는 『노조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소한 일에도 오해를 하게돼 근로감독관이 애꿎게 원망을 사는 일이 많다』고 호소한다.
경력 16년의 김두직 감독관(48)도 담당업체 근로자들에게 모욕적인 봉변을 당한적이 있다.
89년7월 구로공단내 미국인 투자업체인 한국슈어프로덕츠의 근로자들이 미국인사업주가 경영악화를 이유로 미국으로 도피하자 「사업주소환」등을 요구하며 벌이던 농성현장에 들어갔다가 감금 당했다.근로자들로 부터 멱살이 잡히고 옷이 찢기면서 감금된 김씨는 근로자들에게 둘러싸인채 무릎이 꿇리고 농성현장에 들어온 목적등을 신문받은 뒤 30여분만에 풀려났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햇동안 근로감독관 4명이 자체감사에서 적발돼 경고조치 됐는데 이들은 대부분 업무처리 미숙과 업무지연등이그 사유였다.
이들의 일과는 격무의 연속이다. 오전 8시쯤 출근해 오전에는 주로 고소·고발사건의 관련자를 소환해 조사하고 오후에는 소환에 불응하는 사업주등을 잡으러 다니거나 문제된 사업장의 점검·감독에 나선다.

<3월엔 비상체제>
외근을 마치고 오후 6시 전후에 사무실로 돌아와 취업 규칙 심사, 신고사건통계, 노사협의회 개최결과 보고서 등 잡무를 작성하다 보면 오후9시에나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다.
담당 사업장에서 분규라도 발생하면 아예 귀가를 포기하고 현장에서 대기근무를 해야하므로 1년에 보통 한달정도는 0점가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자체가 근로자들의 민원을 대신 해결해 주는것이어서 업무에 대한 보람도 남다르다.
서울관악노동사무소 조각철 감독관(48)은 지난해 설날무렵 관내의 한 업체가 부도나기 직전 근로자들의 임금을 확보하는 기민한 활동으로 임금체불을 구제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서감독관은 구로1공단내 카라디오 수출업체인 에스큐전자가 곧 부도날 것이란 정보를 동향파악을 통해 접수하고 채권자들의 차압이 들어오기전에 근로자대표들과 함께 공장주를 찾아가 이 공장의 임대보증금을 먼저 받아냈다.
조감독관은 『업무상 매달 담당업체의 임금지급 동향을 수시로 파악하다 보면 근로자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회사의 부도사실 등을 미리 알 수 있어 파급우려가 높은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체불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근로자들과 함께 며칠씩 달아난 사업주를 쫓아다닌 끝에 해결을 보거나 노사분규때 현장에서 노사양측을 끈질기게 설득해 간신히 타협을 찾아낸 결실은 오랜 보람으로 남는다.
서울동부노동사무소 곽종호감독관(45)은 아파트 노사분규를 끈질긴 설득으로 해결했다.
지난해 1월 관내 응봉동 대림1차아파트 관리원 50여명이 32%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곽씨는 아예 침구를 이 아파트지하실로 옮겨 관리원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설득작업을 벌였다.
이같은 집요한 설득에 관리원들은 파업기간중 전기·가스등은 끊지않고 경비근무만 태업, 결국 9·7%의 임금인상 타결로 파업을 끝내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근로자들의 주종을 이루는 민원도 시대상황과 경기부침에 따라 변화한다. 86년 이전에는 임금체불에 따른 분규해결이 주류였으나 87년 이후 민주화 추세에 따라 노조결성과 노사협상의 마찰이 빈번해 분규수습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고 지난해부터는 경기하락에 따른 감원·해고의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나 복직 또는 취업알선 업무에 매달리고 있다.
지역특성에 따른 업무성격도 차이가 커 최근 중소기업체수가 급증하고 있는 경인지역의 근로감독관 업무가 폭증하고 있다. 지난해 신발업체의 부도·도산이 많았던 부산의 경우 대규모 임금체불 청산작업이나 부도를 내고 달아난 사업주를 잡으러 다니는 일이 주 업무였다.

<업무량 부쩍늘어>
근로감독관의 과중한 업무부담을 덜기 위해서는 인원증원도 절실하지만 업체의 성격에 따라 감독관의 효율적인 인사관리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예를들면 대규모 노사분규가 빈발하고 있는 울산시의 경우 전체 근로 감독관이 단지 10명으로 이들이 이 지역의 크고 작은 2천1백20개업체를 맡고 있으며 여천공단의 경우 전체를 단 2명이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현재 노동부는 갖가지 대책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이달부터 30인 이하 소규모사업체에 대해서는 민간인 공인노무사가 노무관리를 점검하고 그 결과를 각 지방노동관서에 제출하면 근로감독을 면제해 감독관의 일손을 더는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노동부 이홍지 근로기준국장은 「작은 정부」방침에 따라 당분간 근로감독관을 충원할 수 없는 입장』이라며 공인노무사의 활용 방안이결과가 좋을 경우 공인노무사의 노무관리 대상업체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정갑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