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벽」 못넘는 옐친/러 인민대회 파장 어떻게 번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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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면대결·개혁수정 기로에/의회조사 따라 탄핵 가능성/서방측선 「옐친이후」도 검토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정치적 명운과 그가 추진하는 개혁정책의 사활을 판가름할 분수령으로 평가돼온 제8차 러시아인민대회는 옐친의 패배로 끝나가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등 서방측은 그의 정치적 몰락이 러시아의 보수회귀와 함께 국제질서를 냉전체제로 되돌려 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 아래 그를 살리기 위한 지원대책을 서둘러 강구하는 한편 「옐친이후」에 대해서도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보혁대결로 러시아정국이 혼미양상을 보임에 따라 예정보다 한달 앞당겨 10일 개막된 인민대표대회는 11일 옐친대통령이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해온 국민투표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켰다. 인민대회는 또 대통령권한의 대폭 강화를 특징으로 하는 행정부와 입법부간 권력분점안도 대부분 거부했다. 이로써 옐친대통령은 그동안 공언해온대로 비상대권발동·대국민직접호소등 정면대결을 택하느냐,아니면 보수파의 요구를 일부 수용,개혁정책을 수정하는 등 무력한 대통령에 만족하느냐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옐친진영은 인민대회가 폐막되는 12일 회의에 한가닥 희망을 감추지 않고 있으나 타협에 의한 정국돌파는 물건너갔다는 인식 아래 의회해산 등 정면대결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민대회가 이처럼 옐친대통령의 발목을 붙들수 있는 것은 개혁실패·경제혼란이 가중돼 현정부로부터 민심이 이반된데다 법적체계가 현실에 맞게 수정되지 않은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구소련 공상단서기장 집권하인 지난 77년 마련된 헌법은 88년 인민대회 신설조항,90년 대통령제 신설조항이 추가된 것 말고는 여전히 옛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헌법은 인민대회가 헌법개폐 등 입법에 관한 최종결정권은 물론 행정·사법분야의 주요정책에 대해서도 최종승인권을 갖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인민대회는 「법대로」를 주장하고 옐친진영에서는 「죽은 체제(공산체제)하의 법은 자동무효」임을 내세우며 대항하는 형국이 됐다.
또 강경보수파 대의원들이 이번 대회를 앞두고 공언한대로 실제로 옐친대통령에 대한 위헌여부 조사에 착수,위헌사실이 드러난다면 옐친대통령은 탄핵을 당하거나 대통령직 자체가 폐지될 수도 있게 된다.
앞으로 옐친대통령이 끝내 대결입장을 고수할 경우 러시아는 1917년 볼셰비키혁명직후 혁명세력과 수구세력이 유혈충돌을 벌였던 때와 같은 스무타(대혼란)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한편 서방지도자들은 러시아의 보혁대결이 보수파의 최종 승리로 판가름날 경우 옐친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종말은 물론,동서화해의 기본구조마저 깨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지원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으나 「정신적 지지」「경제원조 약속」이외에는 구체적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정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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