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야쿠트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야쿠티아의 기온을 두고「100도」란 말이 있다. 겨울에는 영하 60도까지 수은주가 내려가고 한여름인 7월에는 반대로 수은주가 40도까지 올라가 1년간의 기온 차를 합치면 100도가 된다는 말이다. 한서의 격차가 심한게 대륙성기후의 특성 이라더니 시베리아 대륙 깊숙이 들어와서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작년 8월, 이곳에 왔을 때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했지만 한낮에는 수은주가 37∼38도를 오르내렸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시베리아는 북쪽이어서 추운 곳이니까 여름에는 서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영하 60도의 혹한과 영상40도의 무더위 속에서 살아가는 이곳 야쿠티아 사람들은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그 혹독한 추위와 더위를 견뎌낼까. 야쿠티아 원주민들이 입고 사는 옷이 또 궁금했다.
타친스키에 사는 77세 된 마리아 가브리나 할머니는 옷 이야기가 나오자, 옷이라면 지겹다는 듯이 손끝을 내보이며 고개를 가로 젖는다.
가죽으로 옷을 깁기가 힘에 겨웠던 것이다. 그녀는 천도 아닌 뻣뻣한 가죽으로 옷을 만드느라 손톱이 다 달았다고 한다.
야쿠티아는 천을 만들 수가 없다. 기후가 나빠 농사는커녕 채소도 안 되는 판이니 목화나 대마나 모시가 재배될 수가 없다.
과거에 옷감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짐승의 가죽뿐이었다. 옷도 신발도 모자도 모두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말과 소의 젖을 짜 마시고 그 고기를 먹으며, 그 가죽으로 옷과 신발·모자를 만들어 사용하니 야쿠티아 사람들은 짐승과 더불어 공생공존하는 셈이다.
겨울에 입는 털옷을 「손」 이라 한다.
이 「손」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털가죽으로 된 웃옷인데 남녀 공통으로 모양이 같다. 「손」을 만드는 재료는 여우의 털가죽과 늑대의 털가죽이 주종을 이룬다.
겨울에 머리에 쓰는 털모자를「베르그에헤」라고 하는데 재료는 밍크 털가죽이나 양 털가죽이 많이 사용된다. 겨울에 발에 신는 신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인데, 이것을 「에테르베슨 라 부르고 재료는 소의 털가죽이나 말의 털가죽으로 만들며, 순록의 털가죽으로도 만든다. 그런데 이 신은 털이 반드시 바깥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털이 바깥쪽에 위치>
내가 야쿠티아에 머무는 동안 별 도리 없이 이곳 사람들이 갖추는 것처럼 양의 털가죽으로 만든 웃옷인 손을 입고밍크 털가죽 모자를 쓰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인 에테르베스를 신고 다녔다.
그런데 내가 신던 털장화는 순록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털이 신의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어서 따뜻한 털을 왜 신 안 쪽에 넣어 만들지 않았나 하고 늘 궁굼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닐 때의 단점임이 곧 밝혀졌다.
시외로 나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들길을 걸어보니 정말로 생활에서 얻은 지혜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느껴졌다. 그 긴 털 장화가 눈에 깊숙이 빠져도 바깥에 털이 있어서 눈이 묻지 않았다. 만약 털이 안쪽으로 있고 가죽이 바깥쪽에 있었다면 눈이 묻어 습기가 차면서 얼어붙게 묄 것이다.
겨울옷은 이렇게 털로 감싸면 되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무슨 옷을 입고 영상 40도나되는 무더위를 견뎌낼까. 천이 없으니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여름철 가죽옷은 소가죽을 부드럽게 가공해서 만든다.
여름철에 입는 부드러운 소가죽 옷을 「으르바하흐」 라 부른다. 바지는 남녀 구별 없이 똑같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야쿠티아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바지를 입는다.
소가죽을 부드럽게 가공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만드는 데에「탈키」라는 기구가 사용 된다. 탈키는 나무로 만든 작두 모양과 흡사한 것인데 작두 밑바탕 같은 나무판에 톱날처럼 이를 판 나무톱날이 나란히 두 줄이 있고, 그 사이에 역시 나무로 이를 판 나무톱날 하나를 끼워 머리 한 끝을 구멍 뚫어 나무비녀를 꿰어 고정시킨 것이다.
소가죽을 부드럽게 가공할 때는 가죽을 물에 담가 불린 후에 이것을 그 나무톱날의 한 끝 손잡이를 들고 연 다음에 집어넣고 짚을 썰 때 작두질을 하듯 반복해서 몇 시간을 눌렀다 들었다 하며 압력을 가해 부드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한 두 차례에 끝나지 않고 소가죽을 물에 담가 불렸다가 또 탈키에 넣고 반복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해야만 소가죽이 부드러워져 여름철에 맨살 위에 입을 옷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가죽이 더욱 부드러워지라고 소젖을 발효시켜 물에 타서 여기에 소가죽을 담갔다가 다시 탈키에 넣고 반복적으로 압력을 가한다. 탈키의 크기는 길이가 보통 2m까에서큰 것은 10m나되는 것도 있다..

<소·말 힘줄로 실 대용>
탈키로 소가죽을 부드럽게 가공해서 바지를 만들어 입으면 남자나 여자나 아랫도리는 해결이 되지만 더우면 윗도리를 벗어야 하는데 여자도 윗도리를 모두 벗고 다닐 수 있었을까.
이곳에 천이 들어온 것은 근대 이후인데 외부로부터 천이 수입된 이후 여자들은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현재는 러시아의 천이 모스크바를 통해 비행기로 야쿠티아까지 공수되는데 전은 여전치 가죽보다도 귀한 물건이다. 야쿠티아에서는 실을 「그흘」이라 한다. 그러나 이곳에 무명실이나 명주실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다 .
여기서 말하는 실은 소와 말에서 뽑아낸 힘줄인데 가죽옷을 만들 때 송곳으로 가죽에 구멍을 뚫고 그흘로 연결해 꿰맨다.
손에 끼는 벙어리 장갑인「위뒬루크흐」도 역시 소와 말의 털가죽을 그흘로 꿰맨다. 위뒬루크흐는 털이 안쪽에 있어서 손에 끼면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손이 시리지 않다.
특별히 발에 신는 버선 같은 것은 없고 털가죽 장화인 에테르베스를 그대로 신으면 발이 시리지 않다. 속에 털이 없는 신을 「사르에틀 에테르베스」라 부르는데, 털이 없는 것이어서 여름에 신는 신발인가 했더니 여름에는 신을 안 신고맨발 그대로 다닌다. 허리띠를「굴흐」라 하는데 이 굴흐 역시 소가죽이나 말가죽을 좁고 길게 잘라서 사용한다.

<닳아질 때까지 입어>
옷을 조사하면서 궁금한 것은 빨래와 목욕이었다. 비누가 없는데 여름철의 땀에 찌든 소가죽 옷을 어떻게 빨고, 목욕은 또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나 말의 힘줄을 뽑아 가죽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꿰매어 만드는 가죽옷은 알몸에 입을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만드는 가공과정부터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옷을 한번 만들면 다 닳아서 구멍이 나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입는다.
그래서 오래 입으면 땀에 찌들고 때가 끼게 마련인데 그럴 때는 소젖을 발효시켜 물과 섞고, 여기에 소가죽 옷을 담갔다가 나무방망이로 두드려서 맑은 물에 헹구면 때가 빠진다. 겨울에 입는 털옷은 물에 담가 빨 수가 없어 대체로 빨지 않으나 때가 흉하게 끼면 눈 위에 펴놓고 눈을 한줌 집어서 털에 대고 문질러 빤다. 그러면 털에 낀 때가 빠진다.
이곳에서는 목욕을 「수낫」이라 한다. 겨울철에는 호수나강· 내가 모두 얼어붙어 목욕을 할 수 없고, 여름철에만 목욕을 할 수 있다. 여름철에 목욕을 할 때는 역시 소젖을 발효시켜 물에 타서 몸을 씻고, 나무를 태운 재로 머리를 감는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있는 그대로 살던 야쿠티아에 근대식의 재봉틀이 들어온 것은 1880년에 러시아인 알렉시에브에 의해서였다.
알렉시에브는 이곳 타친스키에 재봉틀을 가지고 오면서 같은 러시아인인 베르스키와 이오노브를 데리고 와서 감자와 보리의 재배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82년에는 문자가 없는 야쿠티아족에게 야쿠티아 말을 발음 그대로 노문자로 표기하여 문자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 세 사람의 러시아인은 야쿠티아 여인과 결혼했는데, 베르스키는 야쿠티아 문화영웅으로 지금까지도 추앙 받고 있다.
6월20일은 전 야쿠티아족이 열광하는 민족의 대 축제인 「오롱코호」 다. 요즘의 오롱코호에는 천으로 민속의상을 만들어 입는다. 이 옷의 가슴과 팔에는 작은 유리구슬인 부비즌를 실로 꿰어 수놓고 머리띠에도 비즈로 수를 놓는다.
이런 비즈가 옛날에는 중국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1920년께 부터는 일본에서도 들어와 짐승의 털가죽과 물물교환형식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요즘은 전과 비즈의 대부분이 러시아에서 들어온다.

<6월20일 민족축제>
야쿠티아 원주민들은 민족의대축제인 오릉코호때 가슴에 오색의 비즈로 수놓은 천으로 만든 아름다운 민속의상을 입고 싶어한다. 구들은 여름철의 무더위 속에서 하루만 입어도 땀에 찌드는 소가죽 옷보다 통풍이 잘 되고 촉감이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의 신선한 촉감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나는 타친스키구의 지도장(도지사)인 아르체민의 집무실로 초대되었다. 40대 초반의지도장은 작달막한 키에 건강하고 패기가 넘쳐 보였다.
아침결인데도 독한 보트카를 내놓고 「채」(건배)를 부르며 선물로 단도를 내놓는 등 예우가 극진했다.
타친스키구의 국장굽 이상간부가 모인 자리에서 지도장 아르체민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금년은 베르스키에 의해 문화혁명이 일어난 1백주년 기념의 해다. 이번 민족 대축제인 오롱코호를 계기로 민족의 새로운 각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모든 잔재를 깨끗이 떨쳐 버리고 옷부터 전혀 새롭게 야쿠티아족의 전통의상으로 환원하겠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카레」(코리아)는 문명한 부자 나라니 옷감을 원조해 출수 없겠느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젊은 지도자 아르체민의 자존적 독립의지가 어두웠던 이 나라의 앞날을 밝게 비춰줄 등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