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늑장인사/뒤탈 우려해 “너무 신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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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출범 두달… 고위직 인선 10%선/행정공백 비난불구 “첫단추 잘 끼워야”
철저한 검증없이 임명된 장관급 고위공직자의 탈법 및 편법행위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정치적 곤욕을 치르고 있는 김영삼대통령 정부와 대조적으로 빌 클린턴 미 행정부는 출범 2개월이 가까운 지금까지 상원인준이 필요한 2백90개의 고위공직중 각부 장관 및 부장관 등 고작 30명을 인선하는데 그쳐 오히려 신중이 지나쳐 늑장인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3월초 현재 상원의 인준을 받은 고위직은 각부 장관 등 21명,여기에 콜린 파월합참의장 등 조지 부시행정부에서 임명돼 임기가 계속중인 24명을 합해도 확정된 고위직은 15%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장관을 비롯한 미 공직사회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들은 연속성이 요구되는 행정조직이 잘 굴러가지 않는데 대해,또한 일손을 잡지 못하고 술렁이는 공직분위기에 대해 심한 좌절감까지 느낀다는 것이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클린턴대통령의 인선이 시간을 끄는 것은 1차적으로는 여성과 소수민족의 과감한 기용 등 다양성을 내세운 자신의 선거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디 디 마이어스 백악관대변인은 『클린턴대통령의 인선은 예전보다 훨씬 폭넓고 인종·지역·계층을 망라한 다양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서 이같은 여러 조건을 감안한 정밀조사 등 인선에 필요한 사전작업을 철저히 하다보니 자연 지연될 수 밖에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취임직후부터 클린턴과 보좌관들이 경제문제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공직자인선을 더디게한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마이어스대변인은 덧붙인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바로 고위공직자에 대한 의회의 까다로운 인준절차 때문이다. 대통령 임의로 고위공직자를 지명하는 것은 자유지만 피지명자가 상원 해당위원회의 혹독한 통과시험에 합격할지 여부는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회청문회에서 고문 못지않은 질문을 통과하지 못해 인준이 거부될 경우 당사자는 물론 지명권자인 대통령의 체면까지 손상되는 것이 미 의회 고위공직자 인준이다. 따라서 클린턴의 「신중」은 철저한 사전검증을 통해 이같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속셈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같은 경향은 특히 연속된 법무장관지명 및 인준과정에서 클린턴이 곤욕을 치른후 더욱 두드러졌다. 초기 각료인선에서 야심작으로 내놓은 최초의 여성법무장관 지명자 조 베어드변호사(40)가 페루출신 불법체류자 부부를 각각 보모와 운전기사로 고용한 전력이 드러나 지명을 철회한데 이어 클린턴이 두번째 지명을 고려했던 킴바 우드연방법원판사(여·49) 또한 7년동안 불법체류자를 보모로 고용했던 자책감으로 지명을 고사한바 있다.
늑장을 부릴대로 부리면서 차관보급까지도 직접 인선을 하는 등 다른 역대 대통령보다 고위공직자 인선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클린턴의 독단을 성토하는 불평의 목소리도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 레스 애스핀국방장관·마이크 스피 농무장관·페데리코 페냐교통장관 등은 대표적 불평그룹이다.
페냐교통장관은 고위직 인선명단을 백악관에 제출했다가 백악관당국으로부터 『고위직 인선은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소리를 반복해 들어야 했다.
애스핀국방장관은 그가 작성한 고위직 1차 후보명단에 여성이 너무 적다는 지적을 받았는가 하면 헨리 시스네로스주택장관은 뉴욕출신을 너무 많이 거명했다는 경고를 듣기도 했다.
일을 해야겠는데 정작 책임자가 임명되지 않은 상태이고 보니 웃지못할 촌극도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클린턴정부 핵심부서에서 고위공직자가 지명가능성이 큰 인사를 은밀하게 임시직으로 모셔다 일단 일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애스핀국방장관은 아직 지명조차 되지않은 월터 슬로컴브,그레이엄 앨리슨 등 두 사람의 국방전문가를 대동하고 독일 뮌헨으로 출장갔으며,워런 크리스토퍼국무장관은 러시아문제 협의를 위한 출장에 아직 인준도 받지 않은 스트로브 탤버트 주러시아 대사 지명자를 상원 양해아래 대동한바 있다.
이같은 행정공백에도 불구하고 클린턴대통령은 답답한 느낌이 들만큼 아직도 인선에 느긋한 자세다. 그것은 섣부른 인선으로 「변화와 개혁」의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우를 범할 수 없다는 고집일지도 모른다.<윤재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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