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아테네] 1. 마라톤 이봉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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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주가 훈련 후 아들 우석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피로를 풀고 있다.

올림픽의 해가 밝았다. 제1회 올림픽 개최지인 아테네에서 1백8년 만에 다시 열리는 지구촌 스포츠 대축전. 한국 선수단은 종합 10위를 목표로 땀을 흘리고 있다. 아테네 하늘에 태극기를 올릴 메달 기대주들의 훈련 현장을 찾아간다.

4일 오전 6시. 일요일이지만 그의 하루는 똑같은 시간 똑같은 일로 시작된다.

아직 캄캄한 새벽. 그는 삼성전자 동료들과 함께 라이트가 켜진 제주종합운동장(제주시)에서 90분간 25㎞를 달렸다.

새벽 훈련을 마친 뒤 호텔로 돌아와 신발과 유니폼을 직접 손빨래 했다. 그리고 10개월 된 아들 우석이의 액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오후에는 수목원의 2.2㎞ 산책로를 열네바퀴(30㎞) 더 뛰었다.

매일 40㎞ 이상을 달리는 이봉주(34.삼성전자)의 제주 전지훈련은 지난해 12월 8일부터 이렇게 계속돼 왔다. 올림픽까지 휴일 없이 계속되는 강행군이다. 크리스마스도, 송년회도 없었다.

2월과 4월 해발 2천m 고지인 중국 쿤밍에서 두 차례, 그리고 6월엔 2천7백m인 미국 콜로라도 로키산맥 훈련도 기다리고 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지에서 20㎞를 뛰는 건 말 그대로 지옥훈련이에요.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지만 기꺼이 갈 겁니다."

마라톤의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열리는 이번의 올림픽은 이봉주에겐 종착점 같은 곳이다.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다.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위에 그친 아쉬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졌던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

아테네 올림픽 월계관을 꿈꾸는 마라토너는 물론 이봉주뿐만이 아니다. 세계기록(2시간4분55초) 보유자 폴 터갓(케냐), 할리드 하누치(미국) 등 톱 랭커들이 총출동한다. '마라톤의 고향'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더욱 그렇다.

코스도 어렵다. 2천5백년 된 이 코스는 단조로운 풍경에 표고차가 2백50m나 된다. '그리스 병사 필리피데스를 탈진시켜 최후로 몰아간 죽음의 코스'라고 외신은 보도하고 있다.

이봉주는 "지난해 코스를 답사해 보니 40도가 넘는 더위와 높은 습도 때문에 숨이 막힐 듯했다"고 말했다. 코스를 뛰어본 삼성전자 백승도 코치는 "산 하나를 넘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오인환 감독은 "난코스일수록 아프리카 선수들의 장점이 희석된다. 이번 대회가 아시아선수가 우승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아시아선수가 이봉주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부인과 우석이가 제주에 내려온 27일부터 이봉주는 턱수염을 길렀다. "아들을 보니 새롭게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큰 경기를 앞두고 그는 턱수염을 깎지 않는다.

오감독은 이봉주의 가족에 일주일간 전지훈련장 방문을 허용했다. 처음이다. 아테네를 향한 대장정 직전에 주는 작은 선물이다. 숙소도 다르고 고작해야 자투리 시간에 점심을 함께 먹는 정도지만 가족과 시간을 보낸 이봉주는 제주의 돌하르방처럼 행복해 보인다.

"느낌이 좋아요. 1월 1일 새벽 성산 일출봉에서 가족과 함께 멋진 해돋이를 보니 마음도 뿌듯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주=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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