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메가폰 잡는 송해성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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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극장가를 강타한 '살인의 추억', 현재 상영 중인 '실미도', 다음달 초 개봉할 '태극기 휘날리며'. 대규모의 제작비뿐 아니라 실제 사건 혹은 역사의 한 대목을 스크린에 정면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우리 영화계에 중량감을 더해준 기획들이다.

2004년의 영화계도 신세대 감각을 발빠르게 포착하는 일군의 청춘영화들이 개봉을 준비하는 한편에서 이처럼 무게있는 영화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8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오는 3월 촬영을 시작하는 '역도산'은 그 대표적인 예다.

역도산(1924~63)이 누구인가. 함경남도 태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프로레슬링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그는 패전(敗戰)으로 실의에 빠진 일본인에게 미국 프로레슬러들을 줄줄이 제압해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40년이 채 못되는 짧은 생애였지만 일본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영웅'으로 불리는 이런 삶을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은 언뜻 봐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직접 각본을 쓰고 메가폰까지 잡는 송해성(40)감독은 "영웅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전기영화가 아니라 다 이루지 못할 꿈을 좇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송감독에게 '역도산'은 최민식 주연의 '파이란'이후 약 3년 만의 신작이다. 인생 막장에 떨어진 3류 깡패 강재('파이란'의 주인공)에게서 지극히 순수한 내면 풍경을 뽑아내 호평 받았던 감독은 이번에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이면에 감춰진 역도산의 모습을 그리는 데 힘을 실을 참이다.

감독은 역도산이 활약했던 사각의 링을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인생의 축도"로, 그리고 역도산을 "국적을 떠나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평생 정면승부를 벌여온 최고의 파이터"로 바라본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골집을 떠나 돌아보면 마치 돌이라도 될 것처럼 앞만 보고 달려간 삶이었죠. 프로레슬러로 대성공을 거두고 많은 재물도 쌓았지만 일본 폭력배의 칼을 맞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으니 꿈을 향해 달려가다 중도에 쓰러진 겁니다. 이런 그가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이미지는 무엇일까.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렸습니다."

감독은 영화'역도산'이 "슬픈 느낌을 주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역도산 역할에 일찌감치 설경구씨를 점찍은 것도 이런 이유다. "가슴속에 울분이 있는 배우라야 할 수 있는 역할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대한민국에 그런 배우는 몇 안됩니다. 설경구씨는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막 울었다고 하더군요." 송감독은 한양대 후배이기도 한 설씨를 두고 "'오아시스''실미도'처럼 힘든 영화를 줄곧 찍었으니 이제 멜러라도 한 편 해야 CF도 좀 들어올텐데 어려운 역할을 맡겼다"고 안쓰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설씨는 10㎏가량 체중을 불리며 근육을 다지는 한편으로 일본어 공부에도 머리를 싸매고 있다.

'역도산'은 기획단계부터 일본시장을 염두에 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시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제작비가 치솟고 있는 게 요즘 충무로 형편이기 때문이다.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역도산 관련 책이 1백60종이 넘더군요. 스포츠 스타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투수 나가시마 시게오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분량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제작한 것을 제외하면 일본에서도 역도산에 관한 극영화가 만들어진 적은 없어요."

송감독의 말을 듣고 있던 제작사 싸이더스의 노종윤 이사는 "일본에서도 지난해 40주기를 맞아 여러 곳에서 역도산 관련 작품을 기획하고 있더라"고 소개했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스왈로우 테일' 등을 만들었던 프로듀서 가와이 신야 역시 자체적으로 역도산 관련 영화를 준비하다 싸이더스의 기획을 듣고 '역도산'의 일본측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된 경우다. 김형구 촬영감독.이강산 조명감독.정두홍 무술감독 등 주요 제작진은 모두 한국에서 맡지만 출연진에는 역도산과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누는 여성을 비롯해 일본배우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촬영 역시 국내 세트와 일본 현지 외에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 중국 상하이도 염두에 두고 있다.

송감독은 "실제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인 만큼 넘기 힘든 선이 있다"며 작업의 무게를 전하면서도 "자료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영화로 감동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남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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