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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큰일났다" 총리 맡아주오|김상협 총장에 전씨 삼고초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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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5면

이·장사건의 충격으로 정권파행의 분위기가 계속되던 82년6월24일 전두환 대통령은 유창순 총리를 문책, 경질하고 김상협 고려대 총장을 신임총리로 임명한다. 황선필 청와대 대변인은 『국가적 과제가 많은 현시점에서 내각 진용을 바꿔 심기일전의 새 각오와 결의로 국정을 처리한다는 뜻이 담겼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김 총리의 등장은 정치권과 국민들로부터 큰 기대와 화제를 모았다. 민정당에선 『당대에 가장 훌륭한 분을 골랐다』 고 논평했고 그의 영입은 전 정권의 하나의 「수확」으로 비춰졌다. 3공이래 정치적 변동기 때마다 재상감으로 오르내린 인물로 가문·인품·배경 등을 따져 볼 때 그의 총리 기용은 예상을 깬 것이었다.
김 총리가 지닌 특유의 이미지는 이·장사건과 그 직전에 의령 총기난동사건으로 인한 국민들의 좌절과 허탈감을 당장 씻어 줄듯했다. 야당과 재야 일각에선 「거물 정치총리」의 등장이 정치규제자의 해금, 민주화 논쟁의 본격적 개막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순진한」 시각마저 있었다. 이런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듯 김 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막힌 데는 뚫고 굽은 데는 펴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모택동 사상」의 1인자, 「대망을 가진 사람」으로 비춰진 그가 5공 정권에 합류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건이었다.

<함병춘 실장도 보내>
그의 그때 발탁과정은 재직 중, 그리고 아웅산 사건으로 조용히 물러난 뒤에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김 전 총리 (고려대 명예총장)는 이렇게 회고했다.
『총리 임명 사흘 전에 장세동 경호실장이 찾아와 대통령각하께서 꼭 한번 저녁을 함께 하시자고 하니 시간을 내달라고 하더군요..만나자는 이유는 몰랐지만 대통령이 만나자고 하니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어디서 만나느냐고 물으니까 북악터널 입구에 있는 요리집 삼청각 앞으로 차를 타고 지나가시면 지프가 기다릴 거라고 해서 다음날 저녁 약속시간에 그쪽으로 갔더니 지프가 나와있었어요. 그 차를 뒤따라가니 효자동쪽으로 안내하다가 거기가 안가 (청와대 별관·안전가옥)라는 곳입디다. 장 실장의 안내로 전대통령과 단둘이 만났는데 이·장 사건으로 인한 국정운영의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계속 「큰일났다」고 합디다. 민심수습을 위한 국면전환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총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나는 못하겠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다리를 다쳐(그는 7개월 전 집 대문 앞에서 발을 헛디뎌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절툭거린다며 고사했지요. 그랬더니 전 대통령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면 권위도 있어 보이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면서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정말 못하겠다며 간곡히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전 대통령이 총리를 발탁하면서 청와대 밖의 안가로 나와 비밀리에 간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박대통령도 못한 일">
전 대통령의 김 총장에 대한 집착은 끈질겼다. 다음날 전 대통령은 연세대 교수출신의 함병춘 비서실장 (아웅산에서 사망) 을 김 총장에게 보낸다.
『함 실장 내외가 저녁에 우리 집 (혜화동)에 찾아와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총리를 맡아달라며 졸랐지요 .내게 승낙을 받고 가야한다면서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함 실장은 이전부터 우리 집하고 잘 아는 사이지요.』
전 대통령의 집요함에 김 총장은 고집을 꺾는다. 당시는 도저히 불응하기 어려운 처지였지요』라고 회고했다.
『김 총장은 대통령 책임제 하에서 총리는 별 볼일 없고 자칫 욕이나 먹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처음엔 꺼렸지요. 그러다가 간곡한 권유가 계속되니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며 승낙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 전 총리의 제자인 A씨의 얘기다.
당시 이·장 사건으로 권력에 치명상을 입은 전 대통령이 김 총장을 스카우트한 것은 「대어를 낚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장사건의 인책회오리 속에서 그 직전 민정당 사무총장에 임명된 권익현씨(민자당 고문)의 회고. 『전 대통령은 나와 개각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김 총장을 총리 시키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김 총장은 박 대통령 시절에도 고사한 전력이 있다는데, 안 하겠다고 하면 체면이 손상되는 위험부담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했지요 .전 대통령은 총리를 고사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얘기며 위험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더군요. 그렇다면 한번 해 볼만 하다고 말했지요.』
당시 조영길 총리비서실장 (관광공사 사장)은 『김 총장이 총리로 온다고 해서 기이하게 생각했지요.
박정희 대통령도 김 총장을 총리로 쓰려다 불발에 그쳤는데 어떻게 전 대통령이 끌어왔는지 흥미를 끌만했지요.』
김 총장은 5·16 후 62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요청을 떠맡다시피 해 문교장관을 10개월간 지낸 뒤 공화당 입당요청을 끝내 거절한바 있다.
『박정희 의장이 민정이양을 선언할 무렵 5·16세력의 홍종철씨가 찾아와 공화당을 만들었는데 가입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홍씨는 권총을 차고있었는데 「지금 박 의장이 승낙전화를 기다리고있다」면서 강권하다시피 했지요.
내가 거절하니까 화를 내고 간 적이 있지요.』 5공 이전까지 그는 야당의 대권후보·총리물망에 수시로 올랐다.

<「백로」보고픈 심리도>
당시 청와대 비서관 B씨의 기억. 『김 총장의 발탁에는 정국국면전환, 그리고 광주사태에 따른 호남출신 (김 총장은 전북 부안) 기용의 필요성이 우선적인 배경이었습니다. 전 대통령으로선 박 대통령을 거절한 사람을 「나는 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경쟁심도 작용했을 겁니다.
물론 그의 학문적 업적, 학생들로부터의 인기와 존경심, 인촌가문의 배경을 「권력 이미지의 실험」 대상으로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까마귀 사는 곳에 백로를 끌어와 백로를 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을 겁니다. 거기에다 전 대통령과 김 총장의 「묘한 인연」 이 작용했을 겁니다.』
두 사람간의 묘한 인연은 72년10월 유신선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각 대학엔 휴교령이 발동됐고 계엄군이 대학에 주둔한다.
고려대에는 전두환 대령의 1공수특전여단이 주둔했다. 휘하에 민병돈 중령·장세동 소령이 따라왔다.
그때 김 총장의 비서실장이던 이세기씨(민자당의원) 의 이야기. 『71년 위수령, 72년 유신선포로 대학가엔 학생데모·군의 진주라는 악순환이 계속됐지요. 71년에는 수경사 소속군인들이 학생들을 마구 구타·연행해 험악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학생·교수들의 군에 대한 반감은 컸습니다. 거기에 비해 전 대령의 부대는 일단 휴교한 다음 주둔하는 바람에 학생과 직접 충돌은 없었지요.
학교측에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교직원들 사이에는 「이번 부대장은 부드럽다. 신사적이다」는 얘기가 나돌았지요.
전 대령은 원로급 P·C 교수들과 어울려 테니스를 치기도 했습니다. 학교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숙식을 했는데 철수할 무렵 김 총장과 전 대령이 처음 만났지요. 전 대령이 「부대장으로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인사하자 김 총장은 「추운데 고생했다」고 했습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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