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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환시대의 논리』 이영희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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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인터뷰=권영빈 논설위원>
책은 한시대 한 사회의 거울이자 문화의 총체적 집적물이다.
사람과 사회가 책을 만들지만 책은 다시 사람과 사회를 변혁시킨다.
70년대 이후 한국사회 변혁의 밑거름이 된 국내 저작과 이 시대 우리 사회의 길잡이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국내에 번역 소개된 해의 명저를 살펴보는 시리즈 「책과 시대」를 연재한다.
국내 저작물은 본사 권영빈 논설위원이 저자를 인터뷰하여 그 책의 시대적 의미와 저자의 사상적 편력을 탐색해 본다. 【편집자 주】
한 권의 책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 한 권의 책이 대중의 의식을 바꿔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을 쓴 저자 스스로의 삶마저 바꾸어놓는다. 유신정권의 극성기였던 74년 6월, 지금은 사라진 무교동 호수그릴 2층에는 간소하면서도 엄숙한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었다. 백발이 휘날리는 함석헌 옹과 거구의 천관우 선생의 기념사에 이어 이영희 교수의 수줍은 듯 어눌한 답사가 있었다.
이로부터 19년, 이 작은 출판기념회가 지닌 의미는 저자스스로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발간과 동시에 사회과학도서로는 경이적으로 2년 동안 13판을 찍는 폭발적 반응을 보이면서 운동권 필독의 교양서가 된다. 저자는 운동권의 대부로서 저항하는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고5번의 구속, 4번의 재판, 같은 대학에서 두 차례 해직을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했다.

<「분단조장」에 반발>
-『전환시대…』가 나올 무렵 민청학련사건이 있었다. 『우상과 이성』(77년)이 나오자 부마사태가 일어났고『 분단을 넘어서』(84년) 발간이후는 민주화 운동과 「북으로 가자!」는 운동이 80년대 말까지 확산되었다. 각 시기마다 이 교수의 평론집은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각 시기마다 구체적 대응이나 영향력을 미쳤다고는 할 수 없다. 사상적 변화의 저류에 내 책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까. 당시 나는 ①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의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②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대항적 입장에서 ③군인통치의 야만성·반문화성·반 지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④시대정신과 반제·반식민지·제3세계 등에 대한 폭넓고 공정한 이해를 위하여 ⑤남북민족간의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현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글을 썼다.』
-이 교수는 자신의 주장과 논리가 무효화되고 저작물의 인세가 제로가 되는 시점이 참된 민주화의 도래를 뜻한다고 했다. 지금 인세수입은 어떤가.
『11권의 책이 출간되었지만 지금의 인세수입은 제로에 가깝다. 수입은 없지만 기분은 썩 좋다. 그만큼 민주화에 상당히 접근되었다고 본다. 지난 시대의 사상적 낙후성이 많이 극복되었다. 그러나 구시대·구사상의 잔재는 아직도 남아있다. 지난 대선 때 색깔논쟁이 바로 그 예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타락현상과 폭력·절대권력에 의한 해결방식 등 청산해야할 잔재는 한참 남아있다.』
지금 『전환시대…』를 읽는 독자라면 왜 이 한 권의 책이 한 시대를 풍미한 금서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은 18편의 평론으로 구성돼 있다. 유신의 논리에 순응하는 언론을 비판하고 있고, 미국 스스로가 실패한 전쟁이라고 규정한 베트남 전에 어째서 우리는 월남 편만을 두둔하느냐를 질책하며, 「전중망언」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 내부의 친일잔재 청산을 역설한다. 그는 특수논리가 보편논리로 행세하는 현실상황을 고발하고 정확한 사실을 동원해서 잘못된 시각과 논리의부당성을 공격했다.

<지적재충전 서둘러>
-지난 30년을 회고하면서 이 교수는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단 절필을 선언했다. 저항할 독재체제가 무너진 탓인가, 동구 소련의 몰락이후 이론적 패닉현상인가.
『절필이라는 드라마틱한 표현은 부적절하다. 예상했던 사태와는 그 폭과 넓이가 워낙 커서 충격이 너무 컸다. 펜대 하나 걸며 쥐고 직선을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고 상황의 재평가를 하고 싶었다. 지적 역부족도 느꼈다. 낡은 배터리가 방전되는 감이 있었고 지적 재충전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한가지 일에 집착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고 교만일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는 네 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 0·9평의 감방에서 많은 불교서적을 읽게되고 3독의 중증에 자신이 빠져있음을 참회하게 된다. 「탐·진·치」는 욕심과 성급함과 바보스러움을 뜻한다. 이중 특히 자신의 성급함을 일찍 깨우쳐 주었던 아버님에 대한 불효, 아내와 어린 자식에 대한 회한에 가득 찬다. 결국 그의 휴식은 공산국가의 몰락이라는 외부적 충격과 인간의 내면적 성찰이라는 두 요인에 의해 재충전의 시기를 맞게되고 이듬해 그는 사회주의 실패에 대한 인정과 반성을 하게된다.
-91년1월 소장 정치학자들과의 모임에서 이 교수는 「사회주의 실패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간과한데 있다」는 주목할만한 발언을 했다. 새로운 변신의 노력인가, 지난 논리의 수정을 뜻하는가.
『사회주의라는 구조만 갖추면 사회주의적 도덕인간을 만든다는 구조결정론에 대한 반성이었다. 교조적 결정론에 대한 회의, 김일성 주의를 과신하는 학생세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허황된 구조결정론과 사회주의 인간상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치가 꿈꾸었던 이상적 아리안 족이나 모택동의 문화혁명, 김일성의 인간형이 모두 인간의 본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 환상에 불과하다.』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적 대부로서 이들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현실적으로는 자기부정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나는 일관되게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자율적 판단의 주체로서 인간상을 추구해 왔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전에는 자본주의에4, 사회주의에 6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불교의 각성으로 사회주의의 인위적 인간 조형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강요된 것인가를 확인했다. 새로운 자각이었다. 한순간의 폭력으로 계급혁명이 이뤄지는 사회여서는 안되고 공정과 부정을 적절치 배합하는 사회를 그 간담회에서 말했다. 이런 변화가나 자신의 성장이라고 본다.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나의 변화다.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심정이다. 새로운 전환시대를 맞고있지만 딱 맞는 대체논리를 찾지 못하고있다. 지적 지평이 확대되었고 중심이 이동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소외, 비인간적인 억압 요소들이 존재한다. 이젠 체제나 제도보다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 구체적 인간의구체적 행복을 위해 지식인이 봉사하는 게 중요하다.』

<후학들에 바통 넘겨>
-이 교수는 조광조와 이퇴계의 현실 참여를 비교한 한 친구의 충고를 관심 있게 받아들인 적이 있다. 부정적·저항적지식인 역할에서 긍정적·점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변화인가.
『지난 20여년의 세월은 조광조의 역할이었다고 본다. 아무도 말하려들지 않았고 모두 퇴계 역할을 맡으려 했기 때문에 조광조 역을 택했다. 이젠 조광조적 지식인상에서 퇴계적 인간상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랜 억압과 핍박에서 살다보니 정신적·육체적·가정적으로 탈진했고 지적으로도 공허해졌다. 이젠 선수교대 할 때가 되었다. 지난 시절 축적된 후배·후학들의 역량을 기대한다. 나의 역할은 끝났다. 다만 작은 밀알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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