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회 졸속 법안으로 2000억 날아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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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최근 국회에서 벌어진 소극(笑劇)은 국회의 입법 수준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국회 본회의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3일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을 의결했다. 원래 국회 행자위가 행정자치부와 협의해 만든 지원안은 강제동원 희생자 유가족에게 2000만원씩을 지급하는 내용 등이었는데 강제동원 생존자에게도 일시금으로 500만원을 주는 것이 추가된 것이다.

 문제는 입법 과정이다. 500만원씩 지급하려면 2000억원이 든다. 그래서 상임위 토의 과정에서 일제하에서 피해를 본 다른 이들이나 광복 후 국가가 수행한 전쟁에 참전해 피해를 본 이들과의 형평 문제 등이 거론됐으며 결국 ‘500만원’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랬는데 본회의 표결 날 행자위도 아닌 보건복지위 소속의 장복심 열린우리당 의원이 이를 집어넣은 수정안을 발의했으며 결국 통과된 것이다. 원래 본회의 수정안이라고 하는 것은 여야 간에 정치적 타협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돌발적 수정안은 부결되는 게 관행이다. 그런데 이 수정안은 반대 토론자도 없었고 두 명의 찬성 토론만 한 뒤 많은 표차로 의결됐다.

 열린우리당은 얼마 전까지 여당이었다. 이런 당이라면 수정안이 국가 재정과 입법 과정의 보편성을 잘 반영한 것인지 따져본 뒤 돌출 행동을 막았어야 한다. 의원들은 사학법·로스쿨법 등 쟁점에 정신이 쏠려 내용을 잘 모르거나 대선·총선의 표를 의식해 강제동원 피해자 측의 청원성 법안에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돌출 법안이 버젓이 채택된다면 수개월에 걸친 공청회·상임위 토론은 어찌 되는가. 더구나 세금 2000억원이 소요되는 중요 법안이 심의도 없이 국민 앞에 고지서처럼 나타나야 하는가. 입법부는 행정부를 향해 입만 열면 국회의 권위를 존중하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이렇듯 스스로 권위를 내던지고 있다. 이렇게 어이없는 의안 통과는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