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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한국에 지방자치는 없고 지방규제만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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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만난 사람 = 김교준 정치·기획 에디터

 “한국에는 아직 제대로 된 지방자치가 없다.”

 2일 만난 김문수(56·한나라당) 경기지사는 “도정(道政)을 맡아 보니 뭐가 제일 힘든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러면서 “한국엔 ‘지방규제’만 있다”며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취임 첫돌(1일)을 맞아 2일 수원 경기도청 집무실에서 한 인터뷰에서다. 그는 노동운동가→민중당 노동위원장→한나라당 국회의원(3선)을 거쳐 행정가로 변신 중이다. 다음은 김 지사와의 일문일답.

 

경기도청 집무실에서 만난 김문수 지사. 그는 “죽기살기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을 해봤지만 안되더라”며 자신이 한나라당 전신인 민자당에 합류한 것을 “철이 든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진=김형수 기자]

-지사를 맡은 지 1년이 지났다. 할 만한가.

 “헬기 타고 다녀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경기도는 넓고 좋은 땅이다. 사막뿐인 두바이에 비교하면 정말 그렇다. 그런데 두바이엔 세계 크레인의 25%가 모여 ‘명품건물’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는 ‘신도시를 왜 짓느냐’는 소리나 듣고 있다. 그나마 신도시도 건설교통부·주택공사·토지공사에서 다 한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지방자치라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완전히 중앙에 집중돼 있다.”

 -그러면 지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단 얘기인가.

 “현실을 바꾸려고 투쟁한다. 오늘도 반환되는 미군기지 터에 공장이나 대학을 짓게 해달라고 국회의원들에게 애걸복걸하고 왔다. 때론 싸우기도 하고 데모도 한다. 기회가 닿으면 법도 낸다. 발버둥 치지만 되는 건 많지 않다.”

 -그럼에도 ‘김문수였기에’ 가능했던 성과가 있었다면.

 “대표적인 게 1일부터 시행한 대중교통 통합환승할인이다. 부임하니 경기도엔 교통국이라는 것도 없더라. 대중교통 허가권이 모두 시장·군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권한을 찾아오고 교통국을 만들어 108명에 가까운 인원을 배치한 뒤 1년간 달달 볶았다. 결국 예산 1000억원을 투입해 통합환승할인을 성사시켰다.”

 -임기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공들여 추진할 사업은 정했나.

 “첫째 팔당상수원 수질 개선이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이 수도권에 2300만 명이나 된다. 지금도 매일 수질을 체크하고 있다. 둘째 집값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현재 11개 지구 뉴타운 사업이 진행 중이다. 신도시도 두 곳 발표했다. 이미 발표한 광교 신도시의 경우 작은 아파트는 3.3㎡당 900만원에, 큰 아파트는 1200만원에 공급한다. 주변 아파트 시세가 3.3㎡당 2000만원 가까이 하니 우리가 30∼40% 싸게 공급하는 것이다.”

 -수도권 규제를 풀자고 하면 즉각 다른 시·도(광역자치단체)가 반발하는데.

 “수도권와 비수도권 간의 ‘국내전쟁’만 보면 안 된다. 이래서야 일본과 중국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나. 동북아에서 꼴찌로 처지지 않으려면 대통합이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환황해 경제구역도 만들자고 주장한다. 서울·인천·경기·전남북과 중국의 산둥(山東)성·상하이(上海)까지를 벨트화하자는 것이다. 이 안에 공장과 레저시설·대학 등을 짓고 세금을 없애면 중국의 부자들을 유치할 수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균형발전론엔 반대하나.

 “지역균형발전론은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물론 ‘균형발전’이란 구호는 외칠 수 있지만 발전 전략은 아니다. 하향평준화하는 전략으로, 실패했다는 게 공산주의 70년사에 다 나온다.”

 -노동운동가 출신이면서 사회주의의 실패를 말하는가.

 “생각을 바꾼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다. 공산주의 종주국 여성이 한국에 와 청바지 한 벌 값에 몸을 파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북한을 대여섯 번 가봤다. 북한 김정일은 두바이에 가서 배워야 한다. 두바이는 열어서 흥했고 북한은 닫아서 망했다. 반면 망할 것이라고 봤던 자본주의는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미국이 몰락하기는커녕 계속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 자리를 굳혀 나가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현실을 알게 되면서 책임감이 생긴 것이다.”

 -김 지사의 행보를 놓고 좌파는 ‘배신’ 또는 ‘변절’이라고 하고, 우파는 ‘전향’ 또는 ‘귀순’이라고 한다. 스스로 정리된 자체 평가는 뭔가.
 “(한동안 침묵하다가) 철이 든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주류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

 -스스로를 사회 주류라고 보나.

 “그렇다. 나는 과거를 같이했다는 점에서 민노당이나 민주 노총 사람들과 동료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식에서는 이들과 극명한 차이가 난다. 과거도 소중하지만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공감하는 게 더 중요하다.”

 -한나라당이 김 지사를 주류라고 보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 대표나 대선 후보 같은 진짜 ‘간판’이 될 수 있다고 믿는가.

 “지금까지 한나라당 주류도 나를 잘 받아줬다고 생각한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한나라당이 나를 버렸다’며 떠났지만 나는 다르다. 그는 늘 ‘제3의 길’을 강조해 왔지만 난 아니다. 나는 현실주의자다.”

 -평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주의자라지만 실은 이상주의자 아닌가.

 “한국에선 보수주의와 혼동되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보수주의는 다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자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을 이끌어갈 이념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더 긴장해야 한다고 본다. 경기도의 경우 청렴도가 16위로 광역자치단체 중 꼴등이다. 그나마 15위와도 크게 차이가 난다. 갈 길이 멀다.”

 -후배 의원들에게 “골프 치지 말라”고도 한다는데 대중성을 확보해야 할 정치인으로서의 고민은 없나.

 “골프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아니다. 문제가 없으면 골프장 허가도 바로 내 준다. 다만 후배들에겐 ‘골프 치려면 공무에 지장 없는 시간에 당신 돈 가지고 치라’고 한다. 나는 앞으로도 인기를 얻기 위해 생각과 다른 일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나라당 경선을 어떻게 보나. 과열인가 아닌가.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경쟁 때문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걱정하는데 나는 오히려 잘하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간발의 승부가 돼야 관중도 재밌고 후보들도 발전한다. 최근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줄었다지만 1∼2%포인트 차이로 더 줄어 긴장감을 높여야 한다.”

정리=남궁욱 기자

김문수 지사는 …

  “마흔 살까지 살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김문수 경기지사가 젊은 날을 회상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20∼30대 때 김 지시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1951년 경북 영천의 ‘경주 김씨 양반부락’에서 태어난 김 지사는 중학생 때까지 공부 잘하고 진지한 학생이었다. 친구들을 불러서는 수첩을 꺼내들고 적으며 “너는 꿈이 뭐냐.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3 때 학교에서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정학을 당하면서 ‘운동권’의 길에 들어섰다.

 70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투사가 됐다. 미싱공장을 시작으로 위장취업으로 공단을 떠돌며 노조를 세우는 일에 매달렸다. 노동운동을 통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취가 지금도 김 지사가 자신의 약력을 소개할 때 빼놓지 않고 있는 ‘한일도루코 초대 노조위원장’(78년)이다.

 그의 20대와 30대는 수배와 투옥, 그리고 고문으로 얼룩져 있다. 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출신인 부인 설난영씨와도 설씨 집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 맺어졌다.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그는 정치를 시작했다. 민중당을 창당해 진보정당의 싹을 틔워보려고 활동했지만 유권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전국득표 31만 표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패한다. 이우재 당시 상임대표는 서울 구로구을, 이재오 당시 사무총장은 은평구을에서 낙선했다.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 전국구 3번이던 김문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우재·이재오·김문수 등 민중당 트리오는 94년 “변절자” “배신자”라는 질타와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에 공감한다. 개혁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당인 민자당에 입당한다.

 김 지사는 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으로 이름이 바뀐 여당 공천을 받아 경기도 부천 소사구에서 국민회의의 실세인 현역 의원 박지원을 꺾으며 등원한다. 이곳에서 17대까지 내리 3선을 하면서 한나라당 내의 입지를 넓혀갔다. 특히 김 지사는 17대 총선(2004년 4월)을 앞두고 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당내 물갈이를 주도했다. 당시 경험에 대해 “아침부터 밤까지 공천 신청자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는 은밀하게 수십억원을 주겠다고 제의한 사람도 있다. 전부터 잘 아는 사람이어서 참으로 미안했다”고 말한다.

 17대 국회의원을 도중에 물러나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가 된 그가 살림을 맡은 경기도 인구는 서울보다 70만 명이 많다. 그는 한나라당 내의 차기 대선 주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글=남궁욱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