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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⑩] 삼위일체의 정치사적 맥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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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의 대부분은 동방에서 왔다. 서방에서 온 주교들은 6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 300여 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은 모두 동방의 주교들이었다. 동방주교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견해에 우호적이었다. 아리우스(Arius, c. 250~336) 하면, 우리는 후대의 기술 때문에 그를 무조건 안티크리스트의 이단자, 예수인간론의 수호자로 낙인찍고 만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개방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아리우스에게는 예수를 무조건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예수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면, 인간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의 가현(假現)에 불과한 허상이 되어버리고 말 위험성이 있다. 예수를 인간으로 이해할 때만이 오히려 하나님의 유일절대성이 확보되며 다신론의 가능성을 봉쇄할 수 있게 된다. 예수가 인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확실히 보장된다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당시 유행하던 네오플라토니즘의 영향을 받아, 인간도 신과 합일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엑스타시스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아부메나 수도원 본당 내부. 들어가자마자 새들의 소리가 하늘의 찬송처럼 울려 퍼졌다. 대평원에 우뚝 솟은 본당 내부로 새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예수를 단지 인간으로 보는 것은 모처럼 공인된 기독교라는 국교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게 완벽한 신적 권위를 부여해야만 기존의 그레코·로망의 다신교적 다양한 종교형태를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설정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아들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신성을 부여하면 당시의 로마세계에서는 다신론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았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절대유일하며 창조될 수 없는(agennetos) 존재라고 주장했다. 반면 예수는 태어났으며 죽었으며 부활했다. 따라서 예수는 분명 생산된(gennetos) 존재이므로 하나님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절묘한 절충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이다”(homoousion to Patri).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실체라고 하는 뜻이다. 호모우시온(homoousion)이라는 말에서 ‘호모’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우시아(ousia)’는 감각적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는 본질, 실체라는 뜻으로 전통적 희랍철학의 흔한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체(同體)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위(位, hypostasis)를 갖는다는 것이다. 황제에게는 이러한 종교적 판결문은 애매할수록 좋고,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좋다.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다양한 언설들을 황제의 권위 아래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이러한 결정을 많은 사가들이 반아리우스파의 논리적 승리처럼 기술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전반적 분위기는 친아리우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결단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후 서방중심의 기독교 정통론을 수립하는 데 매우 결정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이러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정으로 아리우스는 실각되었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알렉산더 주교와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는 소수파였지만 득의양양하게 개선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잠정적이었을 뿐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알렉산더 주교가 죽고(328) 그를 계승한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오히려 아리우스파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종교회의의 원래 결정인 “호모우시온” 즉 동체론을 견고하게 정통으로 고집했으며, 그 동체론의 입장에서 아리우스파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 때문에 그는 계속 실각·도바리의 인생을 살아야 했고, 그러한 피신의 삶 때문에 오히려 이집트 콥틱 기독교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되었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집요한 싸움을 우리는 매우 난해한 신학적인 논쟁인 것처럼 착각하지만 그 실상인즉슨 보다 단순한 문제에서 유발된 것이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차지하는 경제사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일강의 대평원은 삼모작이 가능한 엄청난 곡창지대였다. 5만㎢에 이르는 이 곡창지대의 소출의 70%가 당시 로마로 갔다. 매년 30만t에 이르는 곡물이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로마로 갔다. 알렉산드리아는 “살찐 로마 거인을 먹여 살리는 암소”라고 불렸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의 정치적 안정은 로마의 하부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대결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대결구도에 대해 황제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판세는 바뀌게 마련이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아리우스파는 동방중심이었고 아타나시우스는 서방중심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궁극적 승리는 기독교 세계가 서방 로마기독교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타나시우스는 파란만장의 생애를 살았고,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나일강 주변의 콥틱 수도사들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그는 주교가 되자마자 나그함마디 주변으로 성세를 누리고 있었던 수도승 파코미우스를 방문하여 깊은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난 후(337년), 그를 이은 황제는 다섯 명이나 되었다. 대제의 세 아들과 두 조카였다. 이들 사이에선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계속된다. 결국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모두를 죽이고 유일한 황제로 등극한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친아리우스적 정책을 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에게 수모를 당한 적까지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직에 머물러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황제라도 교권의 질서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가 없었다.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기번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평어를 적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야말로 세속적 권력의 가장 격렬한 발휘조차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종교적 명분의 원리의 힘을 체험해야 했던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행정당국은 아타나시우스를 주교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설득하거나 강요할 힘이 없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총독 시리아누스에게 명하여 알렉산드리아 시내 중심가로 북부 이집트와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5000명의 로마군단을 이동시켰다. 356년 2월 어느 날 밤 12시쯤, 위기상황을 감지한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휘하의 성직자와 백성들과 함께 야간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성 테오나스(St. Theonas) 교회를 덮쳤던 것이다. 맹렬한 공격으로 성당 문이 열리고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성처녀들이 발가벗겨지고 채찍질 당하고 거친 병사들의 욕망의 분출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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