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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우파의 지주 故 폴웰 목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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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05면

블룸버그

5월 15일 침례교 목사인 제리 폴웰이 73세로 타계했다. 많은 이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또 다른 많은 이에게는 사회와 종교에 심각한 폐해를 남긴 사람이기도 했다.

親가족 · 親국방 내세워 교계 정치세력화 이뤄

폴웰의 아버지는 신앙심하고는 거리가 있었으며 주류 밀매에 종사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폴웰은 목사가 됐고 1956년 교인 35명으로 시작한 교회를 교인이 2만 명이 넘게 다니는 대형 교회로 성장시켰다. 71년에는 리버티대라는 교양 과목 중심의 기독교 대학을 세웠으며, 79년에는 ‘도덕적 다수’를 결성해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커다란 세력을 지도했다. ‘도덕적 다수’ 운동의 4대 특징은 친(親)가족, 친생명, 친국방, 친이스라엘이었다.

그는 항상 논란을 몰고 다녔다. 폴웰 목사는 말을 화끈하게 하는 스타일이어서 텔레비전은 그를 환영해 마지 않았다. 그의 매스컴 활동은 복음주의자들이 미국 사회의 중심 무대로 복귀한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원래 교회의 정치 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특히 자유주의파 기독교의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반대했다. 그러던 그가 ‘도덕적 다수’ 운동을 펼쳐 80년 로널드 레이건 당선에 크게 공헌했다.

폴웰 목사의 접근법은 교파 초월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가톨릭·유대교·모르몬교뿐만 아니라 통일교와도 손잡았다. 교황을 칭송하기도 했다. ‘도덕적 다수’의 회원 중 30% 정도를 가톨릭 신자가 차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폴웰이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신복음주의자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그는 이슬람이 증오를 가르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복음주의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사탄의 하인이라고 주장했다.

‘도덕적 다수’를 해체한 89년 이후 폴웰은 점점 영향력을 상실해갔다. 그가 정치세력화한 기독교 우파는 그 없이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또한 ‘진화’해 나갔다. 2004년에는 ‘도덕적다수연대’라는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지난 10년간 그는 자신이 71년 설립한 리버티대 발전에 주력했다. '좌파'인 하버드대에 대항하는 우파 대학으로 리버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많은 비판을 받고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99년에는 텔레토비에 나오는 보라돌이(Tinky Winky)가 보라색인 데다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동성연애자이기 때문에 어린이 교육에 해롭다고 주장했다. 2001년에는 9ㆍ11 테러가 미국을 세속화한 페미니스트, 동성연애자, 낙태권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한몫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해 격분을 사기도 했다. 미국의 영적 타락에 대한 신이 내린 징벌이라는 말이었다. 그에게는 에이즈도 동성연애를 용인하는 사회에 대한 천벌이었다. 폴웰 목사는 환경주의에도 반대했다. “지구 온난화 주장은 교회가 복음주의가 아니라 환경주의에 집중하도록 만들려는 사탄의 시도”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목소리는 주류 언론에서는 점점 희화화됐다. 심지어 2004년 PBS 조사에 따르면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폴웰 목사보다 요한 바오로 2세를 더 존경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한편 폴웰 목사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60년대에는 흑백 분리를 지지했으나 말년에는 이에 반대했다.

한편 폴웰 목사의 생전에도 미국의 기독교 우파는 점점 진화해갔다. 젊은 층은 전통적인 기독교 우파의 관심사뿐만 아니라 환경문제, 국제 인권, 평화 운동, 빈곤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당신이 거듭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당신은 인간으로서 실패한 것이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이 말을 다르게 받아들이겠지만 확실한 것은 폴웰 목사가 20~21세기 미국의 종교와 정치 관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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