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성] 10년만에 다시 날아온 엽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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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이 저물면 88년이 밝아오고, 88년이 저물면 89년이 밝아오고, (중략), 96년이 저물면 97년이 밝아오고, 98, 99, 2000, 2001, 2002, 2003, 2004……………, 계속 밝아옵니다. 계수님과 온 가족의 새해를 기원합니다."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87년 12월 24일 전주교도소에서 동생 가족에게 쓴 편지다. 정겨운 산 정상에 붉게 빛나는 태양 일곱 개를 수직으로 올려놓은 그림도 함께 실려 있다. 그 태양 꼭대기 왼편엔 '검'이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교도소에서 검열을 보았다는 표시다.

93년 출간됐던 신교수의 '엽서'가 '신영복의 엽서'란 제목을 달고 재출간됐다.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20일을 복역했던 그가 감옥에서 보낸 엽서를 원래 형태 그대로 묶은 영인본이다. 93년 초판 출간 이후 곧바로 절판됐던 책을 10년 만에 다시 매만진 것이다.

책에는 모두 2백30여편의 엽서와 조각글, 그리고 그림이 실려 있다. 저자가 초판본과 비교해 새로이 넣은 것도 상당수다. 특히 이번에는 고화질 촬영과 정밀 인쇄를 통해 원본의 미세한 흔적까지 그대로 살려냈다.

또박또박 눌러쓴 정갈한 글씨와 군데군데 그려넣은 그림이 2004년 오늘에도 큰 울림을 준다. 죽음을 앞둔 극한상황에서도 화장실용으로 지급된 누런 갱지 위에 세상과 시대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을 펼쳐보인 신교수의 육성을 바로 곁에서 듣는 것 같다.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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