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비즈] 억척스런 그녀 ‘유리천장’ 뚫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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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한영회계법인 이성엽(43·사진) 상무에게 전화를 걸면 인기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의 주제곡이 흘러나온다.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이뤄나가는 주인공 하니의 모습이 자신과 닮은 듯해 선택한 곡이다. 그는 4일 인사에서 파트너(상무)로 승진했다. 회계법인에서 파트너가 되면 급여 외에 일정 ‘지분’을 받는다. 단순한 직원이 아니라 경영자의 반열에 올라서는 것이다. 그는 현재 일본기업의 회계감사·컨설팅 업무를 총괄하는 일본사업본부(JBS)을 책임지고 있다. 이 상무는 회계사로서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는 1983년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2년 만에 그만뒀고, 87년 다시 동국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여자가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회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학교 수업까지 들으면서 공인회계사 자격시험을 준비하기란 쉽지 않았다. 새벽부터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 12시 넘어 집에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지만 끝까지 밀고 나갔다. 집안 살림은 어머니와 남편이 도와줬다. 드디어 92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 회계사가 됐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만 기쁨도 잠시 또 다른 바쁜 생활이 시작됐다. 어학 공부에 보다 전문적인 회계지식까지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92∼97년 산동회계법인, 97∼99년 KPMG 베트남사무소에서 일한 뒤 99년 한영으로 옮겨 8년 만에 파트너의 자리에 올랐다. 한 번 맡은 일은 밤을 세워서라도 처리했다. ‘여자’ 보다는 ‘유능한 회계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최선을 다했다. 그는 “남녀를 떠나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주요기업에서 아직 여성 고위 임원의 비율이 낮은 것에 대해 그는 “자질 부족이 아니라 주도권을 쥔 남자들의 편견, 그리고 ‘승진길이 막혀 있다’는 여성 자신의 생각 때문”이라며 “실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 상무는 “예전에 공부할 때나 지금이나 가장 힘든 것은 아이들(고3,중2)이 조금이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엄마가 밖으로 도니 그렇지’라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엄마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도 좋은 교육”이라고 말했다.

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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