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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상)|50년대 후반부터 고개든 맥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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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요즘엔 길거리마다 호프집이 즐비하고 슈퍼마켓진열대엔 갖가지 국산양주가 빼곡이 들어차 있지만 평범한 애주가들이 맥주나 위스키를 가까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그나마 생일 때나 맥주파티라도 한 번 열 수 있게된 것이 경제고도성장기를 맞은 70년대 말이었고 양주는 그보다도 훨씬 뒤에야 우리에게 익숙한 술이 됐다.
보리 고개가 남아 있던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민들에겐 왕 대포 집에서 김치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소주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고달픈 삶의 애환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었고 80년대 초까지도 대학가마다 막걸리 집이 붐볐다.
근세의 격동기를 몸으로 버텨 낸 우리민족에 술은 일종의 위안이자 한풀이의 수단이기도 했고 우리나라 술의 변천사는 민족 애환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종 또한 그때그때 우리 생활수준과 궤적을 함께 그려 왔다.
우리 고유의 전통 술 가운데는 법주·두견 주·황금 주·국화주·소곡 주·안동소주(증류 식)등 오묘한 맛을 자랑하는 명주가 많지만 대중 주로서 지금까지 맥을 이어온 것은 막걸리 (탁주)회석식 소주·청주 정도에 불과하다.
막걸리나 소주는 구한말까지 재래식 시루로 가내수공업을 통해 만들어지다 일제치하에서 근대식 양조장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양조장주인은 지주와 함께 가장 위세를 떨치던 신분이기도 했다.
지난 24년 고 장학엽씨가 평남 진 천에 자본금 1천5백원으로 간판을 내건 진천-양조상회에서 비롯된 진로소주가 본격적인 국내소주산업의 효시.

<해방직후만 해도 불량>
막 소주를 잘못 먹고 실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진로소주에 와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품질을 갖추게 됐다.
특히「야야야야야야 차차차…」하는 후렴으로 시작되는 두꺼비 CM송은 현재 30대 이상의 장년 층이라면 누구나 생생하게 떠올리는 멜로디다.
지난 55년부터 60년대 말까지 라디오나 TV전파를 타면서 진로의 독보적인 이미지를 심었고 국내 최초의 CM송 광고로 우리나라 광고 사에 획기적 족 적을 남기기도 했다.
50년대 후방부터는 소주에 이어 맥주가 서서히 우리 곁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일본 삿포로맥주가 유입돼 국내에 첫선을 보인「삐루」는 33년 조선맥주와 소 화 기린맥주의 설립으로 국내생산체제에 들어갔지만 생산량은 미미했다.
고 박두병씨(두산그룹 초대회장)가 6·25직후인 52년 소화기린맥주를 인수, 동양맥주를 세우면서 기존조선맥주의 아성에 도전했다.
동양의 OB가 한때 조선의 크라운에 7대3까지 뒤지던 시장점유율을 각고의 노력 끝에 뒤집은 것은 5년 만인 57년의 일이었다.
그 뒤 양 사는 출혈경쟁을 자제하고 시장영역을 서로 조정해 OB와 크라운맥주가 시장을 6대4, 또는 7대3사이에서 사이좋게 나누어 갖는 밀월관계를 현재까지 유지해 오고 있다.
이 두 회사가 쌓아 온 맥주시장의 벽이 얼마나 탄탄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젠벡 맥주의 부심이었다.
73년에 미인대회까지 열면서 맥주업계의 기린아로 화려하게 등장한 이젠벡 맥주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실력자이던 박종규 청와대경호실장이 뒤를 봐주고 있었는데 기존 맥주 양 사의 협공에 밀려 1년6개월만에 문을 닫게 되자 시중엔『천하의 박씨가 못하는 일도 있다』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70년대 후반 들어 중동건설 특수 바람을 타고 경기가 유례없이 호황을 누리면서 음주패턴도 고급화추세를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외국산 원액을 그대로 들여와 희석한 것이긴 하지만 국산위스키 길벗(진로·77년), 베리나인(베리나인사·77년)이 처음 선보였고 와인(서양과실주)종류도 인기를 끌기 시작해 파라다이스(파라다이스사·69년), 노블와인(해태주조·74년)에 이어 마주앙(동양맥주·77년)이등장해 국산포도주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도 했다.
맥주소비도 이 시기에 크게 늘어나 동양맥주의 78년 출고량이 처음으로 연간 1천만상자를 넘어섰다(작년 1백만 상자).
80년대 들어 불어닥친 불황에도 불구하고 맥주수요를 더욱 폭발시킨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됐는데 바로 생맥주전문점 OB베어의 등장이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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