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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전쟁의 논리로 정치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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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달은 사라지고 손가락만 남은 세상입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질을 했건만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니 깨달음도 희망도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서민들은 먹고 살 일이 걱정이고, 뭉칫돈을 쥐고 있는 부유층은 돈 굴릴 방법이 없어 고민이고, 기업들은 장사가 안 된다며 아우성입니다. 나라 밖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다며 눈총이고, 핵 문제는 살얼음판을 걸으며 언제든 옥죄어들 기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는 기 싸움과 힘 겨루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온당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언론은 여론조사 등의 방법을 빌려 국민을 이 소모적 싸움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정부도, 국회도, 언론도, 심지어 국민까지도 모두 정치를 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정작 정치는 길을 잃고 헤맨 지 오랩니다.

옛말에 선악이 개오사라 했는데, 현실은 선악이 끝 모를 기 싸움의 빌미로 전락한 셈입니다. 너도 벗고 나도 벗었다면 때를 미는 것이 순리인데, 때는 밀지 않고 서로의 때를 보며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새삼스레 때를 놓고 싸움질인지 모를 일입니다. 언제쯤 스스로 때를 밀고 상대의 등을 밀어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치는 상식이요, 순리입니다. 상식과 순리를 벗어난 정치는 정치가 아닙니다. 본래의 것을 본래의 자리에 놓는 것이 정치라 했는데, 본래가 아닌 것을 본래라 우기고, 본래의 자리가 아닌데 본래의 자리라며 싸움질입니다.

상식과 순리 없이 무슨 잣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달은 없고 손가락만 남은 격이지요. 정치란 완전함과 절대적 가치를 구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대화와 타협, 이해와 협력을 통해 공동의 가치와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상대에 대한 승리만을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승자가 상식과 순리를 얻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승자라 할지라도 상식과 순리를 떠난 승리는 거센 저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민심과 민의는 이런 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정치가 대중조작을 일삼고, 여론을 호도하고, 절대세력과 일방적 권력에 의지해 좌우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힘 자랑과 눈치보기로 빠져나갈 기회를 잡으려 하지 말고, 정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무신 몇 켤레와 사탕 몇 알로 민심을 얻던 시대는 갔습니다. "정치란 본래 그런 거야"라고, "민심은 본래 조석변인 거야"라며 아직도 옛 정서의 향수에 젖어 있다면 생각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본래 민심은 정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순리와 상식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로 상대를 압박하고, 내일은 저 문제를 들고 나와 상대의 공격을 방어한다면 우리 쪽 문제는 잊힐 것이고, 그러다 보면 민심에 허가 생길 것이니 그 틈에 승기를 잡으면 된다. 그러니 끊임없이 상대를 압박하고 반격하는 길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이런 것을 누가 정치라 하겠습니까. 이것은 전쟁입니다. 누가 정치인들에게 '내전'을 허락하겠습니까. 힘과 기회에 의존하는 것은 정치가 아닌 전쟁의 논리입니다.

잘못은 잘못일 뿐입니다. 큰 잘못, 작은 잘못을 가린다 해도 잘못은 잘못입니다. 상대의 잘못으로 내 잘못을 가리려 하지만, 잘못으로 잘못을 가리려 하는 것은 기만행위입니다. 잘못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거나 용서를 받아야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지 잘못에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변명한다고, 또는 저 잘못으로 이 잘못을 덮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총선 등으로 정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올해는 정치가 한 단계 성숙하는 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해가 돼야 합니다. 더 이상 변명과 힘, 그리고 기회주의적 사고로 나라를 혼돈에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다시 상식과 순리 앞에, 민심과 민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신극범 대전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