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겉은 "솜" 속은 "철|김재익 수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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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두환과 김재익의 만남을 두고「힘과 꿈의 결합」이라고 표현한 이가 있다. 적절하면서도 재미있는 말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방면 지식이 당초에는 백지에 가까웠음을 들어『김재익이 아닌 다른 학자라도 전대통령을 사로잡았을 것』이라며『백지에는 먼저 그림을 그려 넣는 사람이 임자』 라고 둘의 만남을 깎아 내리는 측도 있다. 그러나 김 경제 수석은 평범한 화가가 아니었다. 백지(전대통령)도 단순한 백지는 아니었다. 많은 화가들이 서로 자기 그림을 먼저 그려 넣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이중에서 김 수석을 선택한 사람은 전대통령 자신이었다.
생전의 김 수석에게는 적이 많았다. 신 군부의 창업공신들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관료사회, 특히 경제관료 가운데도 비판자가 많았다. 업무방향에 대한 소신 때문에 김 수석을 공격한 이들도 있었으나 권력·자리다툼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외화는 걱정 마라">
김 수석의 입장에서는 본래의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 권력게임이라는 체질 외의 일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는 입장이어서 일종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82년에 일어난 쌀 도입파동을 농수산부 관료로 가까이 서 겪었던 A씨는 김 수석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인에 대해 평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며 증언하기를 꺼리던 A씨에 따르면 외 미 파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김 수석은 대단치 냉혹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김 수석도 그 살벌한 권 부 안에 들어와 자기 소신을 관철하려다 보니 모질어 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이지적인 면모는 냉정한 측면으로, 명석한 판단력은 비정한 면으로, 설득력 있는 논리구사력은 목표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측면으로 바뀌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A씨)
A씨가 김 수석을「다시 보게 된」전말은 이렇다.
80년 새 정권이 출범하게 된 마당에 유사 이래의 대 흉년이 들었다. 냉해 탓이었다. 옛날 같으면 나라인구의 세 명중 한 명은 굶어 죽거나 풀뿌리로 연명해야 했을 정도의 흉년이었다고 한다.
A씨의 말.
『80년 당시 평년작(지난 5년간의 작황을 근거로 한 예상수확량)은 3천8백만 섬이었는데, 실제 수확량은 2천4백66만 섬이었습니다. 무려 1천3백만 섬이 모자랐던 겁니다. 신 군부 입장에서는 초비상이었지요. 새「군주」가 등장하는 마당에 찬란한 서기가 뻗치지는 못할 망정 대 흉년이 들었으니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이해 10월 농수산부의 관계자 B씨에게 김 수석의 지시가 떨어졌어요. 외국쌀 도입계획을 세워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B씨는 1천1백60만 섬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서를 만들어 김 수석에게 보고했으나 기각 당했어요.「1천5백만 섬으로 늘려 잡아라」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청와대의 기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쌀을 들여와 국민을 굶기지 말자는 식이었습니다.』
B씨는 어려운 외환사정 등을 들어 1천5백만 섬 도입에 난색을 표했으나『외환 같은 것은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는 김 수석의 면박만 받고 하는 수 없이 지시에 따랐다고 한다.
『쌀 도입이 계속 진행돼 81년 2월 들어서는 이제 일본쌀 2백만 섬(약 30만t)만 수입하면 되겠다는 것이 농수산부의 판단이었습니다. B씨가 그 내용을 보고하러 남덕우 국무총리의 방에 갔어요. 뜻밖에도 김 수석이 그 방에 와 있더라는 겁니다. 거기서 농수산부의 30만t안은 김 수석의 60만t안과 다시 대립됐어요. 남 총리가 중재에 나서서 50만t으로 결론이 났지요.』결과적으로 청와대의 강력한 종용으로 농수산부의 당초안보다 5백만 섬 가까이 더 수입됐다는 말이었다(쌀 1t은 약 7섬에 해당 됨).

<민심동요 가장 걱정>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새 정권은 가장 겁냈던 듯하다. 전대통령 본인도 나중에 식은 땀 났던 당시 상황을 술회하고 있다.『80년 도에 흉작이 들어 쌀을 외국에서 사 오느라고 애를 먹었는데 내가 농수산부에 지시해 심리전을 썼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쌀을 하역하는 장면을 매일 탤리비전에 찍어 내보내도록 하고 열차도 지방에 내려보내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보여 주라고 했어요. 광주에 가는 쌀을 송정리에 내려놓으니 사람들이 못 보는데 쌀을 광주까지 싣고 가서 광주시내를 뱅뱅 돌아 송정리에 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왜관에서 내리는 것은 대구시내를 돌게 하고.』(전 대통령의 87년 발언. 그러나 농수산부는 이 때문에 수송비를 낭비했다는 이유로 감사원의 감사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또 쌀의 도입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김주호 당시 조달청장이 보여 준 뚝심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김 청장은 박정희 대통령시절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쌀 수출을 도맡아 오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코넬사(미국)의 압력과 유혹을 뿌리치고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쌀을 구매해 뒷날 전대통령으로부터「애국자」라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미국사람들이 참 대단합디다. 자기네가 직접 우리의 예상 쌀 수확량을 조사하는가 하면 느닷없이 새벽에 커다란 선물가방을 싣고 우리 집을 찾아오더군요. 물론 열어 보지도 않고 돌려보냈지요. 나중에 대통령이 된 부시가 그때 부통령이었는데, 한국을 방문해 대사관 관계자를 통해 우리 집에 전화를 한 적도 있습니다.
「미 대사관저에서 함께 테니스를 치자」는 것이었어요. 직급도 직급이려니와 쌀 도입 책임자이던 내가 응할 리 없었지요. 그때 정말 놀란 것은 내가 테니스를 끔찍이 좋아한다는 걸 정확치 알아낸 그들의 정보력·로비실력이었습니다.』(김주호씨·60·현 사료협회장)

<돌연 "사표 쓰라" 압력>
문제는 과다한 도입물량이었다. 낮은 가격을 고집한 한국 측의 태도에 앙심을 품은 코넬사 등은 82년 3월 들어『한국의 조달청관리가 쌀 도입 과정에서 6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고 미국법원에 얼토당토않은 제소를 했다. 이 소식이 날아들자 우리 국회는 곧「외미 도입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따지기 시작했다. 사건초기의 한국언론은 외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대문짝 만하게 보도하기 시작했고, 김 조달청장에게는 한동안「6백만 달러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국회의 조사과정에서 뇌물부분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과다한 도입물량은 문제로 남았다. 앞서 언급한 A씨의 계속되는 증언.
『국회조사를 앞두고 청와대에서 정부관계자들이 김 수석의 주재로 대책회의를 연 것으로 압니다. 그때 금수석이 농수산부에서 불려 간 B씨에게「국회답변과정에서 청와대가 개입하거나 지시했다는 말을 하면 불경죄로 다룰 테니 조심하라」고 경고하더랍니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농수산부가국회의원들에게 장관 위선을 언급할 처지는 못되겠지요. 어쨌든 과다도입에 따른 책임은 농수산부가 뒤집어썼어요. 그런데 국회조사가 마무리되자마자 그 B씨는 장관으로부터「청와대 김 수석의 통보다. 사표를 써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됩니다. 파동을 진정시키기 위한 회생양민 셈이지요. 김 수석에게 이렇게 냉랭한 구석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표는 우여곡절 끝에 반려되고 B씨가 한직으로 좌천되는 선에서 일이 매듭지어졌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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