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설날 고향가는데…”(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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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동 한강성심병원 영안실에는 자신이 다니던 공장에서 작업도중 불의의 사고로 숨진 남기석씨(28·서울 독산동)의 유족들과 고향친구들이 슬픔에 넋을 잃은채 모여앉아 쓸쓸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뒤 83년부터 혼자 서울에 와 돈벌이를 하던 남씨는 밤을 새워 야근을 하던 15일 오전 5시쯤 조작하던 낡은 밀링기계의 체인이 갑자기 끊어지면서 튕겨져 나온 기계부속에 머리를 맞아 변을 당했다.
남씨는 변을 당하기 전날까지도 충남 공주군 신풍면 고향친구들과 함께 아버지 환갑잔치 준비를 의논했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환갑준비를 위해 힘든 일과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고 좋아하던 술까지 끊어가며 월급을 쪼개 한푼두푼 모아 왔습니다.』 남씨의 고향친구 권태영씨(28·회사원)는 친구들 사이에도 남달리 성실했던 남씨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낡은 공장시설과 무리한 야근으로 기계를 다루다 실수하는 바람에 남씨는 그렇게 그리던 아버지의 환갑연을 볼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타향살이 10년동안 월급의 절반 이상을 쪼개어 적금을 들고 매달 30만원씩 꼬박꼬박 집으로 송금해 왔으며 최근에는 월부로 신형전축을 구입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생각이었다는 남씨.
남의 논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아버지와 날품파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돌아가 살날을 기약하며 돈을 모아왔다고 친구들은 말했다.
『남들은 설날 고향 찾아갈 마음에 들떠있는데 너는….』
남씨의 형 기문씨(32)는 초점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지며 땅이 꺼질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향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가슴설레며 부모형제를 찾아가는 귀성전야. 한 근로자의 싸늘한 주검과 모여앉은 유족·친구들의 슬픔을 보면서 명절 뒤안 이런 비극의 의미를 우리사회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이석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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