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누가 더 속물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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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사진·5일 개봉)라니, 영화 제목 치고는 어렵군요. 독일어 원제를 직역으로 옮기면 ‘2004년 여름’이라는 쉬운 제목인데, 밋밋하다고 생각해 국내 수입사가 바꾼 모양입니다. 이 영화의 느낌은 두 제목의 차이와 닮았습니다. 처음에는 한 가족이 여름을 보내는 평범한 이야기처럼 시작하지요. 그런데 끝에는 ‘미필적 고의’라는 법률용어만큼이나 목에 걸리는, 꽤 발칙한 맛이 있습니다.

 아들 하나를 둔 부부가 여름휴가를 즐깁니다. 중산층 이상의 살림인 듯합니다. 교외의 별장에, 요트도 있지요. 의식구조도 보통은 아닌 듯합니다. 미성년자인 아들에게 그보다 어린 여자친구를 휴가에 데려오도록 허락했으니까요. 각방을 쓰건, 한방을 쓰건 말이죠.

 근데 이 여자친구, 가슴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나이에 하는 짓이 만만치 않습니다. 남친을 제쳐 두고 동네에서 만난 성인 남자와 단둘이 요트 타기를 즐기고는,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친의 부모 앞에서 태연자약이지요. 딱히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속된 말로 겁 없이 ‘까진’ 데가 있는 듯합니다. 소년의 엄마가 보기에 말이죠.

 더구나 이 엄마가 뻔히 듣는 마당에, 남친에게 몇 명의 여자랑 자 봤느냐고 물으면서도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소녀에게 소년의 부모가 대응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속칭 쿨(cool)하다고 자부하는 듯한 세대거든요. 잔소리가 하고 싶어 목이 간질거려도, 소녀가 그 남자와 성관계라도 맺지 않을까 좌불안석이면서도, 아이들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의 책임에 맡긴다는 원칙을 지키는 인상을 주려 애쓰지요.

 결국 일을 저지릅니다. 그 소녀가요? 아닙니다. 소년의 엄마가요. 싱싱한 소년소녀에 비하면 그저 아줌마처럼 보였던 이 엄마, 어느 시점에선가 ‘여자’가 돼 ‘소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지요. 복기하자면, 이 영화의 발칙한 맛은 그 위선에 대한 공격입니다.

 이 영화의 재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초반부에 설정된 인물의 특징이 점점 변화하는 데 있습니다. 결론을 알고 나면, 앞서 그려졌던 인물의 특징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눈을 통해 본 주관적인 관찰이라는 것이 실감나지요.
 이는 영화 밖에서 흐르는 시간에도 적용될 듯합니다. 우리는 이전 세대와 다르다고, 진보적이고 열려 있다고 자부했던 이들이야말로 나중에 위선자란 소리를 듣기 쉽지요.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자기 모습을 각성하지 못한다면요. 이런 뉘앙스가 너무 완곡하게 표현돼 이 영화가 성에 차지 않는다면, 3년 전 만들어진 또 다른 독일 영화 ‘에듀케이터’를 권합니다. 이제는 기득권층이 된 68혁명 세대에 대한 독일 젊은 세대의 공격적인 시각이 담겨 있지요. ‘에듀케이터’는 2004년 독일 영화로는 10여 년 만에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이른바 독일 영화의 활력을 과시한 작품입니다. 역시나, 새로운 세대는 앞선 세대를 부정하며 등장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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