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 사람] (26) 서울 마포갑 열린우리당 노웅래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MBC 뉴스 노웅래입니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MBC 보도국 사회부 차장 노웅래(46)씨가 지난 11월, 홀연히 사표를 냈다. 정치와 국민을 매개하는 기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정치 서비스의 공급자인 정치인으로 새 출발 하기로 선언하고, 서울 마포갑에서 출사표를 던진 것.

4대째 마포 토박이인 집안의 둘째 아들인 노씨는 얼마 전 신공덕동에 사무실을 내고 본격적으로 ‘얼굴 알리기’에 나섰다. 21년 기자생활의 소회를 담은 에세이집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자·MBC뉴스 노웅래입니다!’도 펴냈다.

그에게 정치는 낯설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5선 의원으로 국회 부의장과 마포구청장을 두 번이나 지낸 노승환 전 의원이다. 새로 차린 사무실도 그의 아버지가 야당 시절, 낡은 한옥을 개조해 쓰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대를 이어 정치에 나선 2세 정치인인 셈이다.

“내년 총선에 나가겠다고 하니까 친척들이 고개를 내저으시더라구요. 아버지 때문에 그분들 모두들 10번 가까이 선거를 치러야 했거든요. 돈 없는 야당 정치인으로 선거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더 고생이 많았었죠.”

그의 아버지 역시 자신이 걸은 길을 가겠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그리 탐탁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정통 야당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기반이 남아 있는 지역구를 택한 탓에 그는 ‘세습정치’를 노린다는 시선도 받고 있다. 정작 노씨는 “그런 프리미엄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2년 사이에 마포 지역이 재개발로 크게 달라진 데다 아버지가 몸담았던 민주당이 아닌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나와 2세지만 특별히 유리할 게 없다고 했다.

“세습정치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왕조 시대나 권위주의 시절도 아니고, 공천도 주민들이 참여하는 상향식으로 합니다. ‘대물림 정치’라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낡은 발상 아닌가요?”

그는 정당을 선택할 때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솔직히 아버지의 옛 소속당인 민주당을 택하면 조직체계가 잘 갖춰져 있어 유리할 거란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투명한 정치를 해보고 싶은 소망과 소신 때문에 열린우리당을 선택하게 됐죠. 어차피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뿌리가 같습니다. 어느 당 후보냐보다 과연 지역과 국가를 위해 노력할 사람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노웅래씨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아버지’라고 답했다. 정신적으로 큰 깨달음을 주었거나 물질적 유산을 물려준 건 아니지만 한평생 야인(野人)의 길을 걸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했다. 28년에 걸친 군사독재 시절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큰 교훈이었다고. 5·16 후 거의 10년 동안 그의 아버지는 집에 돈을 가져오지 못했다. 생계 유지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가 구슬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거나 가발을 만들어 생활비를 대는 동안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 아버지가 한 약속을 그는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너희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게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언제 어디를 가든 ‘어느 놈 아들’이 아니라 ‘어느 분 자제’란 소리는 들을 수 있도록 살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그 약속을 자신의 약속으로 가슴에 새기고,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수없이 다짐한다고 했다.
사진은 부모님과 함께 찍은 노씨의 결혼식 폐백 사진.

공덕초등학교 출신인 그는 대성중·고교를 거쳐 중앙대 철학과를 나왔다. 83년 매일경제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자가 되어 사회 정의를 세우고 바른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대학 3학년 때의 꿈을 이룬 것. 85년 MBC로 옮겨 사회부·경제부·문화부 등 보도국 각 부서를 두루 거쳤고, 시사프로그램 ‘시사매거진2580’, 대통령선거방송기획단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우리 삶의 단면을 다루고 나서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반향을 지켜볼 때 가장 뿌듯했습니다. 기자 생활의 보람이었죠. 취재가 미진했을 땐 왠지 ‘숙제’를 안한 것처럼 마음에 남았었습니다. 특히 취재 주제가 한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일 때 ‘숙제’를 풀기 위해 더 매달린 기억이 납니다.”

그는 올 초까지 ‘강성’으로 통하는 MBC 노조위원장과 전국언론노조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이런 성향은 MBC 보도국 초년병 시절 얻은 ‘할 말은 하는 사람’이란 평판과 무관치 않다. 기자총회 등의 자리에서 선후배 사이를 의식해 꺼내기 어려운 얘기들은 주로 그의 몫이었다. 그의 책에서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하고 있는 엄기영 책임이사는 그에 대해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역시 MBC보도국 출신인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원은 “뜻은 강하고 곧게, 그러나 항상 부드럽고 온화한 태도를 잃지 않는, ‘외유내강’을 몸으로 보여주는 작은 거인”이라고 치켜세웠다.

노조위원장을 하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일로 그는 ‘지상파 디지털 TV 전송방식 변경’을 위해 정보통신부와 싸운 것을 꼽는다. 그는 2년 동안 YMCA 등 사회시민단체와 연대해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앞에서 100회 가까운 집회와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정치 하는 사람들도 이제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을 버려야 돼요. 국민 생활 속으로 들어가 삶의 질을 높이는 공공 서비스를 담당해야 합니다. 사실 공익을 추구하기는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난 21년 동안 사회 곳곳을 누비며 사회의 목탁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경험이 건강한 정치를 하는 데 밑거름이 될 거라 자부합니다.”

주 진 월간중앙 정치개혁포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