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갈피 못잡는 민자/“「YS구상」은 뭔가” 눈치보기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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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관변단체통합·쌀개방 등 잇단 혼선/당 사무처 감원안 원칙론뿐 손못대
민자당이 요즘 크고 작은 실수를 자주하고 있다. 꼭 해야할 일은 손을 못대면서 엉뚱한 일을 벌였다가 곤욕을 치르곤 한다.
김영삼 차기대통령은 당에 「개혁주체」란 명패를 달아주었지만 당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15일 발생한 당보해프닝은 민자당의 엉성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 기관지인 「민주자유보」는 어차피 해야할 쌀수입개방을 현정부가 「악역」을 맡아 처리해 신정부에 부담을 인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은근히 촉구했다.
당보는 『물러가는 부시행정부는 새로 들어설 클린턴 정권을 위해 악역을 대신 맡아하고 있다』며 대 이라크 공격과 콘트라사건 뒤처리를 예로 들었다.
당보는 약간의 파문을 가져왔다. 우선 쌀수입개방은 쌀수입 절대반대라는 당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당론이란 바뀔 수도 있으니 만약 이 기사가 고도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라면 그냥 보아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략적 고려의 흔적도 거의 없다.
이 주장은 당의 정책결정과정은 아랑곳 없이 한 관계자가 독불장군처럼 주장한 것이 누구의 브레이크도 없이 당보에 실린 것이다. 때문에 말썽이 나자 당 대변인이 당론과 관계없다는 해명을 하는 촌극을 벌였다.
얼마전 당은 신한국건설을 위해 대대적인 의식개혁운동을 벌이겠으며 새마을·바르게살기같은 기존운동체의 통합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던 적이 있다. 그래놓고는 「구태의연한 발상」이라는 화살을 받자 당은 『결정된 바 없다』고 얼른 발을 뺐다.
이 소동은 당의 안일하고 허술한 당론결정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김종필대표가 주재한 고위당직자회의는 실로 당의 중추부인데도 사안의 파장·문제점에 대한 분석수준이 낙제점이었다.
당은 현실적이고 시급한 현안에 대해선 우물쭈물하고 있다. 낭비적인 정치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무처를 대폭 감원해야 하는데 손을 못쓰고 있다.
민자당은 3당합당으로 잔뜩 덩치만 커져있다. 월급을 받는 국장급이 70명 가까이나 되고 인건비가 매월 10억원을 넘는다.
당내에는 김 차기대통령이 국정개혁·정부조직개편을 떳떳하게 밀고나가려면 먼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당부터 손을 대야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어느 조직이든 스스로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원치않지만 민자당 사무처의 경우는 비효율성에 대한 공감이 워낙 확산돼 있어 감원은 불가피한 실정이다. 문제는 어떻게 반발을 감싸고 감원 대상자에게 향후 대책을 마련해 주느냐는 것이다.
당은 이 「악역」을 담당할 당무발전위원회를 추진중인데 작업속도가 지지부진하다. 중진인사들은 대부분 위원회 참여를 꺼리고 있다. 한 고위관계자는 『당이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개혁을 놓고는 끙끙 앓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구석구석 실수도 잦지만 더 큰 문제는 대선이후 당이 큰 방향을 확실히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차기대통령은 신한국위원회같은 별도기구도 포기하고 당에 개혁안마련을 맡겼다. 그러나 당은 아직 개혁의 의미·방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당 정책위는 대선공약 77개중 30개를 골라 우선 실천과제로 정했지만 위원회설치같이 절차상의 문제만 다룰뿐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선 별로 논의가 없다.
정책위는 나름의 고충도 있다. 정책관계자들은 『김 차기대통령의 구상을 잘 모르겠다』며 궁금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 차기대통령은 7∼8개월전부터 비밀연구반을 운영해 2백50개 개혁과제를 1차안으로 마련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러나 정작 당은 아무런 귀띔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지금 어딘가에서 개혁준비작업을 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면 당은 겉돌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김 차기대통령은 불필요한 논란·잡음을 경계해 개혁·인선 등에 관해선 원칙이야기를 빼놓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런 방침이 나름대로의 필요성은 있으나 당·인수위 조직가동에는 다소 역기능이 있는 것 같다.
인수위 인선때 보안이 지켜져 인사잡음은 없었지만 선정된 위원들이 인수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문제점이 있었다. 인수위 기능에 대한 확실한 지침이 없어 인수위가 『인선자료도 챙기겠다』고 했다가 슬그머니 발을 빼는 모습도 보였었다.
개혁에 관한 개념정립이 부족한 탓인지 당 인사들에게선 『신정부가 들어섰으니 뭔가 새롭게 해봐야겠다』는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지질 않고 있다.
다시 뛰자고는 하지만 민자당은 아직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있다. 김 차기대통령은 민자당과 함께 개혁의 끈을 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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