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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學良과 宋美齡(上)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호 26면

시안사변 한달 반 전인 1936년 10월말 뤄양에서 자리를 같이한 장쉐량과 쑹메이링, 장제스 (앞줄 원쪽부터). 김명호 제공

장쉐량(張學良, 1901∼2001)은 1925년 6월 상하이 미국영사관 만찬에서 국민당 원로 후한민(胡漢民)의 소개로 쑨원(孫文)의 처제 쑹메이링(宋美齡, 1897∼2003)을 처음 만났다. 한 세기를 일관한 두 사람의 우의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둘 다 장제스(蔣介石)를 모를 때였다. 그리고 2년 반 뒤인 27년 12월 쑹은 장제스와 결혼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

28년 6월 장쉐량은 부친인 동북왕(東北王) 장쭤린(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하자 친일세력들을 제거하고 동북의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난징 국민정부의 장제스는 북벌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진입했지만 장쉐량과의 제휴가 필요했다. 장쉐량은 통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계양된 곳은 동북에 한 곳도 없었다. 장쉐량이 베이징에 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난징으로 유인해 감금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은 소인이 아니다. 국가 이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군과 친구가 돼야지 왜 제거할 궁리만 하는가”라며 장제스를 설득했다. 장제스와 장쉐량의 첫 대면은 성공적이었다. 다음날 만찬엔 쑹메이링도 참석했다. 쑹과 장쉐량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두 사람이 구면이라는 사실을 장제스는 이날 처음 알았다. 장쉐량은 뭔가 복잡해 보였고 장제스는 곤혹스러워했다. 선양에 돌아온 장쉐량은 두 달 후 동북 전역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했다.

장제스는 중국을 통일했다. 장쉐량은 “쑹이 없었다면 나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훗날 말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동북 5개 성의 군권과 행정권을 일임해 중국의 실질적 2인자임을 모두가 인정하게 했다. 쑹은 제1부인이 되었다. 중국의 황금 10년이 시작됐다. 장제스는 이때부터 공산당 섬멸을 지휘해 장시성의 중앙소비에트 홍군(紅軍) 주력에 치명타를 안겼다. 장정(長征)에 나선 홍군은 옌안에 안착했다. 장제스 명령으로 동북을 일본에 내준 장쉐량은 시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옌안을 공격하게 했다. 주저하는 장쉐량을 재촉하기 위해 시안에 온 장제스를 장쉐량은 36년 12월 12일 밤 감금했다. 이때 쑹메이링은 시안사변이 발생한 줄도 모르고 신병치료차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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