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줌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호 13면

조폭과 아줌마의 공통점. 첫째, 칼을 잘 쓴다. 둘째, 문신을 한다. 셋째, 형님이라고 부른다. 넷째, 떼로 몰려다닌다.
물론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칼을 잘 쓰는 데다, 결혼과 동시에 눈썹 문신을 했으며, 결혼 생활의 지혜를 빌려주는 이웃의 아줌마를 형님이라 부르며, 떼로 몰려가 생활용품을 장만하는 아줌마이다.
그날 우리 아줌마들은 떼로 몰려갔다. 아쿠아슈즈 및 여름용 샌들을 2500원에 판다는 것이 아닌가. 전날 저녁부터 나는 이날 오전의 일정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오전 5시 기상, 아침 끼니 장만, 빨래 및 집안 청소 완료. 오전 7시20분 집에서 나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오전 9시 동네 평생학습관에 도서 반납, 오전 10시 마트 집결. 드디어 오전 10시, 마트의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두 분 아줌마와 함께 신발 매대로 뛰어갔다. 단돈 1만원에 네 켤레의 신발을 장만한 뿌듯함이라니!
우리 아줌마들은 장바구니 가득 신발을 꾸려넣고 서로의 전리품(?)을 대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런 뒤에 우리는 또 몰려갔다. 만화영화를 상영하는 곳으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그야말로 계속 달리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우연히 ‘타임 리프’를 할 수 있게 되어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녀 마코토. 사소한 재미를 즐기던 마코토는 친구로만 생각했던 지아키가 “나랑 사귀지 않을래?”라는 말을 하자, 다시 몇 번이고 지아키의 자전거 뒤에 타기 전 시간으로 달려간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에서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두 갈래 갈림길에서 마코토는 혼자서 왼쪽 길로 걸어갈 수도 있었고, 원래대로 지아키의 자전거 뒤에 타고 오른쪽 길로 가서 지아키로부터 사귀자는 고백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갈림길이 되풀이해서 나올 때마다 나는 가슴이 저미는 듯했다.
거 왜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과거의 선택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꼭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만화영화에서도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지아키가 마코토에게 속삭인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마코토는 대답한다. “응. 금방 갈게. 뛰어갈게.”
영화가 끝난 뒤에 우리들 아줌마는 탄식하듯 말했다. “소녀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어.”
꿈꾸는 듯, 한숨을 내쉰 뒤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먼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집에 가서 기다릴게.”
그래서 우리는 모두 깔깔깔 웃었고, 잠깐이나마 우리를 한숨짓게 했던 소녀 시절을 뒤로하고 우리의 현재를 향해 숨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소설가 이명랑의 시네마 노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명랑씨는 시인으로 등단한 뒤 소설가로 건너가 명랑한 소설집 『삼오식당』 『슈거 푸시』 등을 발표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