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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것은 내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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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여러분들은 지금 걷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태어날 때도 그랬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러분은 스스로 두 발로 일어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걷기의 모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발 한 발, 그 연약한 다리로 최초의 보행을 시작하면서 내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말합니다. 두 발로 일어서 걷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짐승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침팬지나 고릴라도 하루에 기껏 걸어야 3㎞ 밖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채집시대의 원 인류는 하루에 30㎞ 이상 걸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느 짐승이 중력과 맞서 이렇게 등뼈를 똑바로 세우고 대지 위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먼 지평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수가 있겠습니까. 걷는 것만큼 멀리 있던 풍경들이 내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풍경은 이야기를 잉태하고 그 이야기는 다시 우리를 걷기의 역사 그 현장으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레베카 솔닛의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그때 바퀴 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내 생명의 몸무게를 발견하고 그 리듬을 발바닥에 기록합니다. 그렇게 해서 걷기의 역사는 몸의 역사가 되고, 생각의 역사가 되고, 전국을 세 차례나 돌고,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올랐다는 김정호와 같은 지도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걷는 목적에 따라 여러 문화사가 쓰여집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간 예수와 룸비니에서 간디스 중류까지 걸어간 석가의 걸음에서 종교문화가 태어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당을 거닐던 걸음에서 소요학파의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도시의 유보자(遊步者)들은 발터 벤야민의 문학을, 황톳길의 유랑은 김삿갓의 즉흥시를, 그리고 소금장수와 보부상의 무거운 걸음은 오늘의 기업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지금 600㎞의 국토를 답파하려는 여러분 대학생들의 걸음은 무엇을 창조하려는 것입니까. 이미 그것은 자동차를 타고 스쳐가거나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본 추상의 국토가 아닐 것입니다. 초음속, 마하 시대의 반역아들은 35억년 전 바위와 모래밖에 없었던 황량한 지구에 처음 원시 식물과 동물들이 나던 때의 공간으로 갈 것입니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만들어 낸 생명체들이 생사의 끝없는 순환을 되풀이하면서 이 땅의 흙을 만들어 내는 역사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젊은이의 두 다리가 선조들의 모든 육체, 모든 영혼과 접속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국토를 걷는다는 것은 이 슬프고 장엄한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읽는 흙의 독서 행위입니다.

지도자가 없어도 문명은 망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칼리굴라를 비롯해 어리석은 황제들이 32년 동안이나 통치했을 때도 멸하지 않고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흙의 기운이 떨어져 국토가 황폐해지면서 로마는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걸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책이 아니라 저려오는 다리로 오늘의 역사를 읽고 숨찬 심장으로 국토의 맥박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할 국토가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분단된 국토지만 내 땅을 내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이 행복을 외치십시오. 걷는다는 것은 내가 자유로운 인간이요, 한국인이라는 것을 지구 위에 새기는 황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어령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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