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어려움 실감한 사장 댁 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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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해 그리 크지 않은 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입사한지 10년이 넘어서야 중견사원으로 승진하게 됐다.
이 덕분인지 연말엔 사장님으로부터 한해를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사장님 댁에서 직원부인들과 함께 간단히 차 한잔하자는 초청을 받게 되었다. 남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후 무엇을 입어야 좋을까 고민했다.
그냥 부담 없이 입고오라는 남편 말에 만약 다른 직원부인들이 내가기가 죽을 정도로 옷을 잘입고 온다면 필히 나에게 옷을 한 벌 사줘야 한다는 약속을 억지로 받아 냈다.
남편이 자세히 그려 준 약도를 받아 들고 남편회사 사장님 댁을 찾아가면서 얼마나 잘해 놓고 살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약도에 그려진 집을 찾았을 때 그 집은 예상과는 딴판으로 호화판 빌라가 아닌 3층 짜리 평범한 연립주택이었다.
먼저 도착해 있는 직원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쑥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던 나는 거실을 한번 둘러보고 당혹 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실 한편에는 소박한 국산TV 한대와 소형전축만이 놓여 있었고 커피 잔 세트도 숫자가 모자라 각양각색이었다.
그제 서야『사장님이니까 무척 잘살겠지』라고 중얼거린 나에게『한번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라고 웃으며 답한 남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면서 사장님이 남편의 입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어려운 회사사정을 자세히 설명했을 때 그 얘기가 단순히 의례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특히 이웃의 어느 회사는 수출길이 막혀 그 회사사장부인이 병원 간병 인으로 나가는 믿지 못할 사례도 있다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하루에 2O여 개가 넘는 기업이 쓰러지고 중소기업주의 자살이 잇따르는 최근의 상황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와 퇴근하는 남편을 반갑게 맞으며 나는 갑자기 수다스러워 졌다.『세상에서 월급쟁이가 제일 속 편한 것 같애. 오늘사장님 뵙고 느낀 건데 나 매일 그렇게 신경 써야 하는 사장님 하나도 안 부러워요. 참 여보 새 옷 안 사줘도 돼요.』
김지숙<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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