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청산과 문민시대의 길목에서(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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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92년은 단순한 연대기적 의미를 뛰어넘는 정치사적 의미를 지니는 한해였다. 길게는 30년간의 군사정치에 종지부를 찍는 한해였고 가까이는 5년간의 6공화국이 막을 내리는 한해가 되며 새 정부를 이끌 대통령을 선출한 숨가쁜 선택의 한해이기도 했다.
따라서 지난 1년에 대한 회고와 평가는 곧 30년 군인정치에 대한 포괄적 조망과 아울러 민주화 과도기로서의 6공 정부에 대한 자리매김과 그 맥을 같이한다.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을 청산하고 새 정치의 새 물결을 타야하고,개발독재의 정경유착이라는 경제운용 방식에서 벗어나 국제화에 걸맞은 새로운 경제정책이 제시되어야 하며,강압과 굴종을 강요한 억압사회에서 떨쳐 일어나 시민이 사회를 주도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만 할 전환점에 우리는 지금 서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강압적 통치와 군사적 효율성을 내세운 권위주의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찾았는지,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소중히 간직해야 할지를 모두가 한번쯤 다시 반성해야 한다.
인권과 자율이 파괴되고 개발독재의 경제적 이익을 구가하기도 한 30년의 역사였다. 체제와 반체제,민주와 반민주의 갈등과 대결이 첨예화하면서 죽기 아니면 엎드려 살아야 한다는 기막힌 세월을 살기도 했다.
그 인고의 긴 세월이 6월항쟁을 거치고 6·29선언이 나오면서 또다른 형태의 대결과 갈등의 삶을 살아야 했다. 세대간의 보혁갈등,지역간의 감정대립이 더욱 벌어졌고 노사간의 분규와 갈등으로 하루인들 무사하게 넘긴 일이 없을만큼 우리는 지역간·계층간·세대간·빈부간·노사간의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마치 삶의 전부인양 살아왔다. 개인적 욕구가 분출되고 집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경험도 체득했다.
이제 우리는 시민이 주인이고 시민이 사회를 주도하는 시민사회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이룩해야할 당위성을 지난 어둡고 긴 세월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갈등과 대립의 삶이 아니라 화합과 자율의 시민사회를 구축하는 노력이 우리 스스로 지금부터 찾아내야할 삶의 존재방식이다.
6공의 민주화 업적을 평가하는데 있어 우리가 인색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보혁갈등과 노사간 대립을 민주화과정에서 치러야할 값진 희생이라고 보고 그 갈등과 대립을 권위주의적 강압방식으로 해결하려들지 않고 인내와 자각으로 해소하려했다는 점에서 6공 정부의 민주화 노력은 평가받을 것이다.
선거를 통해서 한 나라의 정치문화를 평가받게 된다. 선거로 시작해서 선거로 끝난 지난 총선·대선동안에 일어났던 몇개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변형된 권위주의적 생존방식을 다시 지적하게 된다. 개발독재의 선두주자로 권위주의의 기고 긴 세월동안 막강한 부를 챙긴 재벌기업이 정치참여라는 변신술을 통해 권력을 창출하려 했던 시도는 문민시대로 가는 길에 새롭게 돌출한 걸림돌이었다.
국민당의 지지율이 낮았다는 투표결과 하나만으로도 기업의 정치참여는 더이상 나와서는 안뇔 금기사항임을 우리는 지난 총선과 대선을 통해 거듭 확인했지만 당사자들이 그 미망에서 헤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선동안 확인한 또 하나의 권위주의 잔재는 부산 기관장 회식사건을 통해서다. 권력 엘리트층이 아직도 개혁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권위주의에 안주하는 행태를 그들의 대화록을 통해 확인했다. 또 대선기간중 후보들간의 자제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호남간의 깊은 골이 치유되지 못하고 있음도 우리가 확인한 슬픈 현실이다.
숱한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수명의 기업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절한 사건이 줄지어 일어난 것도 우리가 한해를 보내면서 무엇이 경제를 살리는 길인가를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이웃 일본이 날로 번창하고 대만경제가 뜀박질하는 판에 우리 경제는 어디에 있는가를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정경유착과 중소기업의 소외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경제운용과는 전혀 다른 진정한 의미의 기업자율성과 도덕성이 보장되는 새시대 새스타일의 경제정책이 대망되는 한해였다.
결국 우리는 권위주의 시대를 형식적으로는 청산했지만 지난 30년간의 군사문화잔재는 지금도 기득권 세력의 내부에서,재벌의 정치적 야망에서,지역감정의 갈등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청산해야할 숙제고 우리가 안고 있는 구조적 사회문제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5년의 갈등과 대결의 무분별한 민주화 과정은 가위 혼돈의 시대였다.
그 혼돈속에서 그나마 한줄기 질서를 찾고 화합의 실마리를 찾는데 정부와 기업,그리고 시민들이 비상한 노력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기에 우리는 오늘의 안정과 개혁의지를 살릴 수 있다는 낙관을 하게 된다.
이 낙관적 현실론을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정치가는 새 정치를,기업가는 새 경제를,시민은 새로운 시민사회의 정착을 위해 각기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를 깊이 깊이 생각해야 하는 세모의 길목에 우리는 지금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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