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관련수사 “정면돌파” 시도/정주영대표 왜 강경선회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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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남·특보 사법처리 움직임에 반발/수세탈출 모색… 민주와 공조엔 실패
19일 아침 대선패배에 승복하고 승자에게 축하까지 보냈던 정주영국민당대표가 24일부터 갑자기 「불복」을 주장하며 강경태도로 선회해 그 진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선이후 칩거해온 정 대표는 예정보다 빠른 24일 오전 귀경,김대중 전 민주당대표를 전격 방문해 『당선무효소송을 공동으로 제기하자』고 제안했다. 정 대표는 이 자리에서 『투·개표과정에 엄청난 부정이 있었다. 우리가 결정적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같이 소송을 내자』고 김 전대표를 설득하려 했다는 것이 동교동측에서 흘러나온 내용이다.
정 대표의 이같은 갑작스런 태도변화는 일련의 예고과정을 거치며,국민당의 공식입장과도 궤를 같이해 주목된다.
정 대표는 지난 23일 경주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인사말을 통해 『김영삼씨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옴쭉달싹 못하게 해 졌지만,경제를 위해 승복했다』고 「본의는 불복」임을 시사했다. 정 대표가 강경선회를 직접 실천에 옮긴 것은 24일이다. 이날은 현대중공업비자금 유용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분신으로 통해온 이병규특보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이 떨어지고,부산기관장모임 도청사건과 관련해 아들인 정몽준의원에 검찰의 2차소환이 발부되었던 날이다. 정 대표는 예정보다 이틀 앞당겨 가족·친지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이와 함께 그는 김효영사무총장에게 「긴급최고위원회의」소집을 지시했다.
이날 낮 12시 긴급 소집된 회의는 『당국이 수사의 초점을 호도하고 있다』며 정부에 공정수사를 촉구하고 나아가 『중대결심을 할 수도 있다』고 한동안 잠잠했던 특유의 강공을 예고했다. 곧이어 그는 동교동을 찾아가 선거과정과 그 이후 수사의 편파성을 지적하며 급기야 「선거무효소송」의 공동제기까지 제안했다.
이어 25일 정 대표는 휴일에도 불구하고 당사에 나와 집무실을 정리하고 당장 출근을 준비했다. 이어 대변인실은 성명을 발표,『이번 대선은 전대미문의 지능적 부정선거,관권·금권·공안·언론공작선거』라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성명은 이어 이미 지난 21일 당직자회의에서 취하하기로 했던 선거관련 고소·고발에 대해 『공식적으로 취소·취하한 적이 없다』고 번복,화해제스처를 거둬들였다.
이같은 과정에서 보여지듯 강경선회의 배경은 인신구속으로까지 진전되고 있는 당국의 수사에 대한 위기의식이라 할 수 있다. 정 대표는 「경제를 위해」라고 승복의 이유를 밝혔듯이 대선이후 대화합,보다 구체적으로는 국민당과 현대에 대한 승자의 관용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수사는 정 대표의 희망과 달리 아들 정몽준의원과 분신인 이병규특보에게로 좁혀져왔다. 일부에서는 이미 정 대표 자신에 대한 사법처리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을 대신해 정세영현대그룹회장이 각처에 선처를 호소하고 다녔으나 별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자 막바지까지 칩거하며 기다리던 정 대표는 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돌파구를 찾아나선 것이다. 정 대표는 부산기관장모임의 불법성보다 도청이라는 행위의 불법성을 집중 부각하는 수사,현대중공업비자금에 대한 검찰의 광범한 추적을 「정치적 보복」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현대중공업에 대한 수사와 사장·전무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은 그가 「승복」의 이유로 내세웠던 「경제살리기」(좁은 의미에서 현대에 대한 당국의 선처)를 망치려는 의도라며 불쾌해한다는 것이다.
정 대표가 공세의 카드로 동교동에서 내놓은 것은 「선거무효소송」외에도 김영삼대통령당선자의 선거자금에 대한 폭로 등도 시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세의 방법은 물론 야권공조다. 제1야당과 공조함으로써 공세의 강도를 높일 수 있을뿐 아니라 명분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야권통합의 가능성까지 고려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제 민주당을 보호막으로 삼아 현대가 선거전에서 벌였던 위법적 사안의 제재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전 민주당대표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음』을 이유로 우회적으로 거부한 뒤 『당차원에서 협의하라』고 공조의 가능성은 남겨뒀다. 민주당으로서는 이미 승복을 선언한 상황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투·개표부정을 들먹이며 선거무효주장을 하는 것은 오히려 국민정서에 반하는 것이라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국민당에서 확실한 부정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양당의 공조는 확실해지고 정국은 다시 회오리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 대표가 얘기했다고 전해지는 「투·개표과정의 부정」은 수많은 참관인들이 지켜보는 과정에서 이뤄졌기에 명백한 부정이 있었다고 믿기 힘들다. 어쩌면 정면돌파로 현대와 국민당을 모두 구하려는 정 대표의 또다른 위협용(?) 전술일 수도 있다. 정 대표의 강경선회는 결국 정부의 수사와 연동해 정국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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