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워진 「사회의 보수화」(14대 대선 재분석: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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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그만 행복」지키려는 중산층 확산/농촌 개혁욕구 강해 여촌야도 “옛말”
93년의 길목에 선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특히 5공,6공 12년을 거치면서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여러가지 잣대가 있겠지만 「안정속 개혁」을 내세운 김영삼씨를 대통령으로 뽑은 12·18대선은 하나의 망원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면 첫번째로 보이는 법칙이 하나 있다. 이른바 「아파트평수의 법칙」이다. 이번에 생긴 신조어인데 『아파트평수의 크기와 여당의 득표율은 정비례한다』는 얘기다. 이는 안정희구보수세력이 눈에 띄게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이룩해놓은 나름대로의 「조그만 행복」을 지키려는 계층이 매우 두터워 졌다는 얘기다. 이른바 중산층의 성장이 급속이 이루어진 셈이다.
아파트가 제일 많은 서울을 한번 보자. 먼저 강남이 눈에 들어온다. 김영삼후보는 서울 전체에서 김대중후보에게 1.4% 졌으면서도 중·대형아파트가 몰려있는 이 지역에서는 두배로 압승을 거두었다.
이 법칙은 목동아파트단지가 단적으로 실증한다. 세입자가 많은 1∼4동에선 두 후보가 엇비슷했으나 중산층아파트가 밀집해있는 5∼6동에서는 김영삼후보가 김대중후보를 두배이상으로 눌렀다. 평수가 더 큰 여의도아파트단지에서는 김 후보가 표차를 더욱 벌렸다. 상계동 아파트단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목격됐다.
서울에서 선거를 치러본 여당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아파트지역이 훨씬 쉽다고 말한다. 그만큼 중산층이 안정쪽으로,보수쪽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역감정이 큰 영향을 미쳤지만 계층적으로 보더라도 정권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김영삼후보는 바로 이 점을 파고 들었다. 「안정속의 개혁」을 외쳤다. 그러곤 상대방에게 혼란·불안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김대중후보도 일찌감치 중산층의 변화를 읽고 뉴DJ플랜을 진행해왔으나 막판에 전국연합과 손을 잡아 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중산층의 안정추구경향이 여당이 마음을 놓거나 야당이 실망할 정도로 굳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서울대 장달중교수(정치학)의 분석.
『여당에 대한 중산층의 기대는 차선의 것이다. 그들은 1년이상 기다리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실망이 쌓이면 그들은 바뀔 수 있다.』
중산층에서 나타난 보수화경향은 연령별로는 20대로,지역별로는 도시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 대학생을 포함한 20대에서도 야당은 변화의 선풍을 일으키는데 실패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20대는 가장 큰폭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념투쟁이나 사회변혁운동에서 차츰 고개를 돌리고 안정·체제순응쪽으로 다가가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의 모교수는 이런 현상을 예시했다.
『서울대의 91년도 입학생중에서 강남 8학군출신이 8백명을 넘어섰다. 이런 변화가 캠퍼스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기성세대가 보면 우려할 정도로 대학이 보수화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과외덕분에 풍족함을 너무 일찍 맛본다. 차도 너무 고급이다. 어느 단과대학의 경우 조교 11명중에 르망이상이 7명이나 된다고 한다.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나라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이런 생활의 모양새도 20대를 바꾸고 있다.』
20대가 이처럼 바뀌고 있는 것이다. 20대 전반은 6공민주화이후의 세대여서 「민주대 반민주」의식이 현저히 옅다. 남북고위급대화로 통일도 더이상 맹목적 쟁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투쟁보다는 효과적인 적응에 익숙하고 현실을 보는 눈에 균형이 자리잡고 있는 폭이 크다. 젊다고 「삐딱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사회에 진출하는 20대 후반도 국제화·정보화에 둘러싸여 있다. 컴퓨터로 학과공부를 치른 이들은 「안정속의 점진적 개혁」이 현실적임을 눈치보지 않고 인정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변화를 바라는 목소리는 오히려 농촌지역에서 크게 들린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3·24총선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전통적인 여촌야도현상이 점차 거꾸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자당 K의원(경남·2선)의 진단.
『우리 지역구에서 지난번 총선때는 민주당이 1천여표밖에 얻지 못했다. 그런데 YS태풍이 이번에 오히려 DJ가 2천7백여표나 얻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불만심리가 YS바람속을 뚫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농민과 만나보면 「도대체 살기가 힘들다. 세상이 확 뒤집어져야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고 한다.
사실 여촌야도라는 현상도 농촌이 불만없이 살 수 있어서 생겼던 일은 아니었다. 예비군을 소집하고 막걸리·고무신을 풀어 반대소리를 꾹꾹 눌러 억지로 만들어냈던 관제지지표가 대부분이었다. 민주화와 부분적으로 달라진 선거풍토때문에 솔직한 의사표시가 등장한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만약에 지역감정의 색깔이 조금만 없었더라면 농촌의 변화지향 요구가 대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렇게 흐르는 저류속에서도 민주·국민당은 서로 승리를 장담했고 일부에서는 막판까지 박빙의 대결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주영선풍은 거품에 불과했고 김대중후보도 분명한 한계점을 갖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정치분석가들은 민주·국민당이 어디서 무엇때문에 착각했는가를 놓고 설왕설래의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민주당에 관한 분석과 설명부터 들어보면 김대중후보의 온건측근들은 결정적 패인이 전국연합과의 연대라는 것이다. 사회적 보수화경향에 맞춘 뉴DJ계획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급진적 세력과의 연대로 마음을 바꾸려던 온건중산층을 놓쳤다는 분석이다.
두번째 패인은 말없는 다수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못해 대응방안을 세우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여론조사에 나타난 두꺼운 부동층이 사실은 안정지향의 「말없는 다수」였는데 민주당은 이를 순수부동층,더 나아가 변화지향의 부동층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한 평론가는 『88년 4·26총선때 김대중씨의 평민당지지세력은 서울에서도 여론조사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지만 총선결과는 이들의 평민당 몰표로 평민당을 제1야당으로 부상시켰다』고 상기했다.
그는 『당시 김대중씨는 야권후보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몽땅 뒤집어 쓴 분위기여서 그의 지지자들조차 숨을 죽였던 것』이라며 『그와 같은 현상이 이번에는 거꾸로 김영삼씨 지지자들에게서 엿보였다』고 진단했다.
김 당선자가 3당합당으로 변절자라는 욕을 먹고 있는데다가 그후 끝없는 권력투쟁,그리고 노태우정부의 부정부패·경제실정 등이 겹쳐 대놓고 김 당선자를 지지한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정주영거품인기로 나타났다는 진단이다. 현대의 극렬하고 기발한 선거운동방법도 그랬지만 더욱 정 후보가 내뱉는 말의 재미는 늘 시중에 풍성한 화제를 낳게 마련이었다. 특히 정 후보가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공격·비방·폭로하는 내용이 사실여부를 떠나 화제의 초점으로 떠올라 인기충천으로 보였던게 사실이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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