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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펀드시장 5년내 세 배로 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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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18면

1996년 11월 어느 날.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의 박현주 압구정 주재 강남본부장과 최현만 서초지점장이 한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직장 선후배로 깊은 신뢰를 쌓아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지만, 그날 두 사람의 대화에선 긴장이 감돌았다.

창업 10주년 미래에셋 최현만 사장

“이제 우리도 한번 해보자.” 박 본부장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뜬금없다는 듯 최 지점장이 물었다. “우리의 뜻을 펼칠 회사를 만들자는 거다. 곧 작업에 들어간다.” “갑작스러운 말씀에 경황이 없습니다만, 형님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그로부터 때로는 식당에서, 때로는 사우나에서 두 동지의 작전회의가 이어졌고, 8개월 뒤인 1997년 7월, 미래에셋그룹의 모태인 미래에셋캐피탈이 태어났다. 당시 두 사람은 39세와 36세. 젊었지만 이미 둘은 증권가의 고수(高手)로 명성이 자자했다. 둘은 전형적인 영업맨이었다. 그러나 거래 수수료에 집착하지 않고 긴 안목으로 우량주를 고르는 가치투자로 고객 자산을 불렸다. 그 뜻을 확실히 하기 위해 직접 회사를 만든 것이다.

그런 미래에셋이 어느새 10돌을 맞았다. 세월의 무게만큼 미래에셋도, 시장도 변했다. 미래에셋의 펀드 판매액은 현재 23조8000억원으로 업계 1위에 올랐다. 투자자들의 관심은 온통 주식과 펀드에 꽂혀 있다.

박현주 회장의 옆에 서서 미래에셋을 국내 굴지의 금융그룹으로 키운 최현만(46) 미래에셋증권 사장을 만났다.

서울 여의도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그는 얼굴 살이 좀 빠져 보였다. “체중이 63㎏ 그대로인데요.” 최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입술 오른쪽 위엔 작은 물집이 터져 있었다. 증시에 큰 판이 벌어져 분신술이 아쉬울 만큼 뛰어다니니 그럴 만도 하다. “기관투자가를 만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는 현장을 뛰어야 고객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상품개발 아이디어도 샘솟는다고 했다.

10년 새 회사가 많이 컸지만 그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그동안 이룬 성과에 비추어 열 살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벌일 만도 하건만, 내부적으로 조촐하게 치르기로 했다고 한다. “아직 시작입니다. 50년, 100년 가는 회사를 만들어야지요.”

최근 주식시장 얘기로 화제가 옮아갔다. “굉장히 좋게 보고 있어요.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자본시장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는 최근의 글로벌 주가 상승에 대해 “30억 인구의 새로운 시장이 출현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예컨대 중국의 2억, 인도의 1억 중산층이 부상하고 동유럽까지 발흥하면서 소비 증가→기업 수익 신장→고용 확대→소득 증가 등으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에 코스피 지수가 별로 안 좋았음에도 최 사장이 공격적 경영을 펼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결과는 좋았다. 고객들에게 ‘해외펀드:국내펀드:변액연금’ 등으로 3:3:3의 포트폴리오를 짜도록 권유했다. 1억원을 맡긴 투자자는 지난해 1700만원꼴로 벌었다. “자산배분 전문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줬어요. 지난해 주가지수가 제자리걸음이었지만 수익률이 짭짤했지요.” 지금은 진격 나팔을 더 세게 불어 ‘국내펀드:해외펀드’를 6:4로 나누도록 조언하고 있다 한다.

“1800까지 왔지만 조정을 받아도 심각하진 않을 거예요. 이게 미래에셋의 공식적인 ‘뷰(view)’입니다.” 길게 봐서 그는 “펀드시장이 앞으로도 해마다 20∼30%씩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60조원인 주식형 펀드시장 덩치가 약 5년간에 걸쳐 150조원까지 성장할 걸로 봅니다. 펀드 규모가 이렇게 커지면 주가는 과연 얼마나 오를지 짐작이 되지 않을까요.”

그는 “뒤늦게 몸이 달아오른 투자자들에겐 과거 증시에서 얻은 실패의 교훈을 되새기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유혹에 휩쓸려 덩달아 주식을 사기보다는 펀드를 대안으로 삼으라는 말이었다. 최 사장은 “지금처럼 분위기가 좋아도 미래에셋 창구에선 절대 직접 투자를 권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펀드의 장기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펀드 판매 수수료를 내릴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최 사장은 정색했다. “미래에셋은 사실 판매보수를 더 올려야 합니다. 자산배분처럼 남다른 컨설팅 서비스를 하기 때문입니다. 수수료를 많이 내더라도 차별화된 서비스를 받고 싶은 고객을 모시고 싶습니다.”

다만 그는 서비스 수준에 따라 다양한 수수료의 상품을 내놓아 고객들이 골라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전용펀드처럼 수수료를 대폭 낮춘 상품도 계속 선보이겠다는 취지였다.

JP모건이나 골드먼삭스처럼 기라성 같은 회사들이 국내 펀드시장에 도전장을 내미는데 긴장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최 사장은 “그들과 겨뤄도 자신있다”고 했다. “아시아시장에 나가서 피델리티 같은 회사와 경쟁해보니 우리도 수익률 면에서 뒤지지 않았어요.” 요즘엔 인도에 이어 베트남 시장 뚫기에 한창이다. “베트남에 증권사 현지법인을 세우려고 합니다.” 운용사가 펀드를 내놓고 증권사가 마케팅과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풀 서비스를 직접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그는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돼도 외국계가 시장을 독식하진 못할 것이라고 했다. “창업한 뒤 200개가 넘는 상품을 투자자들에게 제공해 상품개발능력을 검증받았습니다.
부동산펀드 같은 복합상품에서도 앞서왔고요. 앞으론 보험까지 묶은 상품도 선뵐 수 있을 겁니다.”

“증권사 사장이지만 주식 직접투자 권유 안해”

하지만 그는 “제2, 제3의 미래에셋이 나와야 국내 자본시장이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창의적인 금융인들이 증권사를 세우는 데 진입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인근 중국 음식점으로 옮겨 계속됐다. 개인사를 많이 털어놓았다. 최 사장은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시작해 잘나가는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CEO 생활도 어느덧 10년째다.

그의 성공은 인생의 쓴맛을 토양으로 삼았다. 그는 세 차례 휴학과 학생운동, 행정고시 준비 등으로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9년 만에 졸업했다. 행시에 고배를 마셔 결국 취업을 결심한 그는 증권사를 택했다. “그런데 원서가 상과대학에만 달랑 3장 내려와 있었어요. 인사 담당자에게 원서 구경이라도 시켜달라고 졸랐지요.” 한신증권(동원증권 전신) 최종면접까지 갔던 그는 시위경력과 나이가 문제됐다. “떨어졌나 보다, 마음 졸였어요.” 그런데 그를 좋게 본 인사 담당자가 넌지시 귀띔했다. “회장님이 동그라미를 크게 쳐놓았으니 걱정 말아요.”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의 동그라미 하나가 오늘의 최 사장을 만든 셈이다. “창업을 위해 퇴사한다고 하자 김 회장께서 몹시 섭섭해하셨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 만나면 ‘최 사장 잘하고 있지? 언제 폭탄주 한잔 해야지’ 하면서 격려해주십니다.”

치과의사인 아내와는 신혼 때 강서구 내발산동의 13평짜리 연탄보일러 집에서 살았다. 돈이 없어 부인의 병원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 원당에 어렵사리 개원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도 원당의 불우노인과 청소년을 돕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지분도 늘어갔다. 그는 “돈 모은 게 없어 아내가 이를 뽑아 모은 돈으로 회사 지분을 샀다”며 웃었다. 지금은 수백억원대 주식 부자가 됐지만 그는 “정확한 주식 가치는 모른다”고 했다. 미래에셋증권 임원 10여 명에게 개인지분 7만 주씩을 나눠줄 정도로 개인보다는 회사가 먼저인 성격 때문이다. 최 사장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10여 년 전 증권 영업점을 누빌 때나 지금이나 그의 성실한 생활과 진솔한 인간미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고 칭찬한다. 그가 과연 증권사 CEO인지, 일선 영업맨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얘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최 사장이 없었다면 오늘의 박현주 회장도, 미래에셋도 없었을 것이란 평가가 나올 정도다. 시장에서 박 회장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엇갈릴 때가 있다. 그러나 최 사장에 대해 불호(不好)를 얘기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박 회장과 최 사장의 관계는 신뢰 그 자체다. 최 사장은 창업 이래 박 회장의 결재를 받은 일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만큼 철저히 믿고 맡긴다는 얘기다.

은퇴 때까지 꼭 이루고 싶은 꿈과 은퇴 후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미래에셋을 아시아 최고의 금융그룹으로 키우는 게 꿈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은퇴 후에는 시니어 골프대회를 돌면서 미래에셋을 간접 홍보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요즘 생각이 좀 달라지고 있어요. 강의와 강연을 통해 후배 금융전문가를 키우고 싶습니다.” 최 사장은 싱글 골퍼다. 베스트 스코어는 1언더, 71타. 하지만 그는 요즘 골프장 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자본시장의 중요성을 알리는 방송 출연 등을 마다하지 않을뿐더러 이화여대에서 경영학 겸임교수로 강의하기 때문이다. 학생들 사이에 벌써 재미있고 알차게 강의하는 교수님으로 입소문이 파다하다고 한다. 최 사장은 업무 현장의 경험이든, 지인들과의 대화 내용이든 늘 메모로 남기는 습관을 갖고 있다. 메모장들을 재정리해 살아있는 강의 교본으로 활용한다.

지난 10년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최 사장이 앞으로 10년 뒤에는 미래에셋을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시켜 놓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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