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딛고 재즈 발레로 대성|"음악 들리는 한 춤 추어야죠"|일 체임버컴퍼니 안무가 한국계 일인 야가미 게이코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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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불운 속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그러나 불운을 극복하는 이를 만날 때는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청각장애와 싸우며 정열적인 재즈 댄스로 온몸을 불사르는 무용가 야가미 게이코(30·K 재스발레스튜디오 체임버컴퍼니 안무가)를 무대에서 만날 때 느끼는 감동 그것은 바로 한바탕 목숨을 건 결전을 치르고 난 승자에게 바쳐지는 경이로움이다.
무용에 있어 음악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
가냘픈 보청기에 의지해 무대에 설 때마다 이번 공연을 마지막으로 청력을 완전히 상실해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싸우며 야가미씨는 「이 순간의 삶」에 모두를 걸며 살아가고 있다.
큰언니 구루미(34)· 둘째 언니 가오리(32)와 함께 이끌어가고 있는 체임버컴퍼니는 현대 발레창작 활동을 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무용단중 하나.
83년 무용교육기관인 K 재즈발레단을 설립한데 이어 88년 전문공연단체인 체임버컴퍼니를 결성한 그는 클래식 발레의 우아함과 재즈의 독창성을 혼합한 독특한 안무를 선보이며 일본 컵 재즈댄스 페젠트 그랑프리(88년)·89브로드웨이 댄스 스페셜 국가대표 선발 팀 피선(요미우리 신문사 주최) 등 주요 상을 휩쓸어 무용계의 선두주자로 급부상 했다.
지난달 29일 창무예술원의 초청으로 체임버컴퍼니를 이끌고 생전 처음 서울에 온 그의 손에는 이제는 우리에게 유물(?)처럼 돼버린 쇼와 17년 (1942년)에 작성된 청보라색 호적등본 한 통이 들려있었다.
경성부 관철동100 김강경치의 둘째아들 김지조.
16세 때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와 오사카로 옮겨 살다가 일본인의 데릴사위가 돼 토목회사를 경영했다는 것이 그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 가나오카 기노스케(75년 작고)신상명세의 전부다.
운명의 순간까지 애타게 그리워하던 외할아버지의 고향 땅을 대신 밟게된다는 사실에 벅차 행여 한국의 친척들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오사카 한국영사관을 찾았으나 서울 관철동100에서 살았었다는 단 한가지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
『74년 국교6년 때 동경신문이주최한 전국무용콩쿠르 예선을 통과, 본선을 치르는 날이었지요. 저를 그렇게도 귀여워해 주시던 외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는데 위독하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몹시 가슴이 아팠지만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기 아까웠어요. 친척들은 장래 무용가로 대성할지 못할지도 모르는 꼬마가 병원으로 달려가지 않고 대회에 나가겠다고 고집 부린다고 무척 나무랐지요』
그는 실낱같은 청력을 불잡아두기 위해 수술대에 누울 때마다 수술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싸우느라 고통스러운 것만큼이나 이때를 힘들었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몸을 추스리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지만 이 대회에서 그는 최고상을 받았고 열네살 때 유수한 공연단체인 동보의『한 여름밤의 꿈』에 최연소 발레단원으로 출연하는 등 일본 무용계의 꿈나무로 부상했다 .
그가 발레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세돌을 채 못 지나서부터.
무용을 무척이나 좋아해 슬하의 세 자매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었던 부모의 뜻에 따라 구곡팔백자 발레단 대판연구소에 입단했다.
77년부터 발레단의 솔로이스트로 활동할 정도로 클래식 발레에서 착실한 성장을 해오던 그는80년 뉴욕에서의 유학기간 중 재즈발레의 세계에 매혹돼 진로를 수정, 83년 일본에서의 데뷔공연에서 무용계에 충격을 안겨주며 관객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가 청력을 거의 상실한 것은 여섯 살 때 중이염을 심하게 앓고 나서였다.
보청기를 통해서나마 계속 소리를 들을 수 있기 위해 그간 수술대에 오른 것만도 다섯번.
최근에는 더욱 상대가 나빠져 거의 해마다 수술을 해야만 그나마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지난 90년10월 네 번째 수술을 앞두고 열린 발표회에서 그는 마지막 작품 삼아 자신의 삶을 표현한 『길』을 무대에 올렸다
일본에서 내노라하는 이비인후과 의사가 집도하기로 돼있었으나 워낙 상태가 나빠 『수술 후 완전히 안 들릴 수도 있다」면서 자신 없어 했기 때문이었다 .
자신의 삶의 전부이자 단 하나의 희망인 춤을 다시 추지 못할지도 모르는 절박함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장애와 영광, 사랑과 이별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담아낸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 받은 것은 물론 그가 가장 사랑하는 대표작이 됐다.
그가 작품을 할 때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소리」.
이번 내한공연에서 가장 호평 받았던 작품 『나이트』도 일본TV로 방송된 다큐멘터리 『사물놀이』를 보다가 그 소리에 매료돼 만든 것이다.
『사물놀이의 장단을 듣는 순간 내 몸 속에 한국인인 외할아버지의 피가 끓고 있음을 절감했다』는 그는 끝내 외할아버지의 친척을 찾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 한다.
1m68㎝의 훤칠한 키에 『무용을 하지 않았다면 야쿠자(일본의 폭력단)가 됐을 것』이란 농담도 서슴지 않는 그녀.
그 명랑함 뒤에 춤을 추는 동안 땀이 귓속으로 흘러들어 갈까봐, 공중도약이나 회전할 때 귓바퀴에 달려있는 보청기가 떨어 질까봐 늘 가슴을 졸여야하는 비애가 고독처럼 숨어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홍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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