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블랙박스 소동의 교훈/정태수 국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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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블랙박스 파동」이 엿새째 계속되고 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지난달 20일 노태우대통령에게 전달한 지난 83년 소련군에 격추된 KAL 007기의 블랙박스가 「알짜는 없고 껍데기뿐」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전해지면서 시작된 이번 파동은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한심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문제의 블랙박스 전달과정과 파동전후에 보여준 러시아측의 외교관례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다. 러시아측은 애당초 항적기록(FDR)을 전달할 의사도 없었고 전달하겠다고 조금도 시사된 바가 없는데도 한국측이 괜히 화풀이를 해대고 있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측이 FDR를 한국에만 전달할 수 없다는 발언은 한국이 순수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그들의 인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옐친대통령은 방한직전 가진 모스크바주재 한국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나 그밖의 자리를 통해 KAL 007기사건의 「모든 것」을 풀어줄 수 있는 자료를 넘겨주겠다고 말했다. 문제의 블랙박스가 한국과 러시아간 우호의 「상징적인 물건」이었을 뿐이라는 모스크바의 때늦은 해명 역시 지극히 안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정부의 태도다. 우리 정부는 한마디로 사건의 진상규명보다는 「한건주의식 외교쇼」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블랙박스가 껍데기임이 판명됐음에도 불구,며칠동안 쉬쉬했던 정부의 작태는 이를 전달받고나서 북방외교의 또 하나의 성과 운운하며 자화자찬해 왔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애당초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서…』라며 오히려 「그나마도 뜻밖의 선물」이었다는 식으로 둘러댄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은 차치하고 KAL기사건의 진상은 반드시 풀어야 하고 그 첫 열쇠가 문제의 블랙박스에 달려있음을 모를리 없는 우리 정부가 왜 그토록 허술하게 당했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러시아 양국수교 대가로 30억달러의 경협차관을 대뜸 내준 것을 두고 비판여론도 적지 않다. 「그때」 영문도 모른 채 숨진,그러나 아직껏 유골조차 추스르지 못한 2백69명의 탑승자들과 그 유가족들에 대해 우리 정부는 또 무어라고 변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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