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처럼 우리도 중립”… 선거판세엔 촉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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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재계 대선지원 애써 자제/정치권과 공식창구 사실상 중단/그룹간부중심 「물밑지원」은 활발/경기침체 겹쳐 정치자금도 다소 줄어든듯
대통령선거를 맞아 재계는 스스로를 헤엄치는 오리에 비유하고 있다.
물위로는 유유히 떠가지만 물속 발놀림이 부산하듯 기업들도 저마다 선거향방에 촉각을 세우지만 겉으로는 너무 조용하기 때문이다.
연말 사장단회의 등 기업들의 가장 바쁜 시기와 대선이 겹쳐 당초에는 「인사 등 중요한 경영스케줄은 선거뒤로 미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삼성이 1일 사장단회의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주요 그룹들은 일단 정치적 일정과 관계없이 예정된대로 정상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정치권과 재계의 공식적인 창구는 유창순전경련회장이 지난달 『더이상 정치자금을 모금하지 않겠다』고 밝힌 이후 사실상 끊어진 상태다.
그동안 정치자금 등 정­경의 핵심문제를 은밀하게 요리해온 5대그룹 총수모임도 국민당 창당으로 비밀유지가 힘들고 그룹들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라 금융실명제에 대한 재계의 의견조정 이후로는 모임이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때 국민당의 정경분리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해 관심을 끌었던 경제5단체장 월례회의도 1일 다시 열렸으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후보가 일부 그룹회장들을 만난 사실이 국민당측에 의해 공개된뒤 부터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계인사들끼리의 비공식적 접촉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그룹총수의 외국출장도 되도록 자제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민자당과는 등을 돌리기 힘들고 재계의 원로인 정주영후보와 현대그룹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데다 민주당의 감정을 거스를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입장』이라며 『당초 계획했던 3당후보 초청토론 등 선거와 관련된 재계의 모든 공식모임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반면 재계의 공동전선이 무너진만큼 기업 내부적으로는 잦은 여론조사를 통해 선거판세를 좇는 등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전의 대선과는 달리 현대그룹이 직접 선거와 연결되어 있고 선거결과에 따라 재계의 판도 또한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김영삼후보의 자금줄로 「2H2L」그룹,김대중후보와 가까운 그룹으로 「2K1H」,정주영후보의 배경에는 현대는 물론 「1H1S」 등 형제그룹을 꼽고 있지만 이들 기업들은 『연고지역에 따른 편가르기일 뿐』이라며 『정부도 중립이듯 우리도 중립』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기업들의 움직임도 훨씬 은밀해지고 있다.
대우그룹의 경우 김대중회장의 정치참여 파문이후 지난 총선과는 달리 국민당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또 지난 87년 대선때 유세에 직접 직원들을 동원하는 등 「머리수」를 앞세웠던 기업들도 이번에는 『일반 직원들까지 캠페인에 나서면 비밀유지도 힘들고 부작용이 크다』며 부장이나 중역 등 간부들을 중심으로 가까운 후보에 대해 은밀한 지원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규모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지만 경기침체 탓인지 정치자금의 규모는 다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자금의 루트도 그룹회장과 고위정치인이 직접 만나 건네지는 형태가 줄어드는 대신 실무진을 통해 제공되는 경우가 많아지고,정보기관을 통해 우회적으로 건너가는 자금은 정부의 중립선언에 따라 거의 사라졌다는게 재계관계자의 이야기다.<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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