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협 길닦기 서울나들이/옐친 아시아국 첫 방한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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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러 소비재차관­한국 자원확보 실리교환/반세기 적대 청산 우호협력틀 마련 전기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기간중에는 양국 사이의 기본관계 설정에서부터 구체적인 협력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먼저 「기본관계조약」 「이중과세방지협정」 「세관협력협정」 「문화협정」 등을 체결하고,경제부총리간에 「경제공동위 구성·운영 규정」,국방장관간에 「93년도 한·러 관계 발전을 위한 군사교류에 관한 합의서」를 각각 채택하게 된다. 이로써 양국관계 발전을 위한 기본틀은 마련되는 셈이다.
이밖에도 부문별 장관회담을 통해 자원 공동개발,러시아의 첨단 기초과학 기술과 우리 산업상 개발능력을 결합하기 위한 과학기술협력,연해주 한국공단 설치,경제협력차관 재개,러시아 군수산업의 민수용 전환에 한국 기업 참여,문화·청소년 교류·협력,군사교류 문제 등 양국간의 구체적인 협력방안이 논의될 예정이다.
「한·러 기본관계조약」은 자유·민주주의·인권존중·시장경제원리가 한·러 양국간 공동추구 이념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의 방향선회는 미국의 주도에 의한 세계질서 변화 와중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러한 양국간 접근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촉진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외교가 주변 강대국과 「주고 받는」 대등한 관계에서 우호발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안보분야까지 협력이 확대되고 있는 점이다. 러시아는 북한에 대해 공격용 무기를 팔지 않고,원조가 아닌 상업적 거래로만 무기를 넘겨주며,북한·러시아간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내용도 자동개입조항을 「피침시」로 축소해석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러시아의 태도는 거의 모든 무기체제를 러시아의 것으로 유지하고 있는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도 인접국들의 경쟁적인 군비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 이번에 양국 국방장관간에 교환될 군사교류합의서는 군장성 교환,군사훈련 상호참관,함정 및 비행대의 교환방문 등을 규정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북한이 팀스피리트를 구실로 남북대화를 중단하고 있는데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팀스피리트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중국과는 입장을 달리했다. 따라서 내년 팀스피리트훈련에 참관,훈련의 성격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러시아의 이같은 적극적인 태도에 힘입어 한국 외교는 대미 일변도에서 탈피해 균형외교 내지 자주외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일부 외신들의 분석처럼 한·러관계가 대미·일관계에 영향을 주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사실 이같은 한·러간의 합의가 진전되고 있는 것도 미·일 등 우방과의 사전협의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번 기본관계조약이 기본적으로 모스크바 선언이나 고르바초프의 제주도제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다자안보문제,무기거래 등에서의 한계도 이러한 한국의 위치를 반영한 것이다. 옐친대통령의 방한직전 노 대통령이 방일,미야자와 일본 총리와 전격회동한 것도 한국외교의 기본 노선을 분명히 시사해주는 것이다.
러시아도 북한과의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개정하는데는 소극적으로 남북한 등거리외교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이번 방한은 양국관계의 우호 발전에 장애가 될 과거사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옐친대통령의 국립묘지 헌화,한국전쟁 관련 자료 인도 약속,대한항공 007기와 관련해 추가자료 제공,사과표명 등이 그것이다. 또 시간이 걸리겠지만 블랙박스도 넘겨주고,코지레프외무장관은 희생자유족들과도 만날 예정이다. 이것은 양국관계를 건설적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는 대러시아 경협이다. 당초 한국측은 지불보증문서 제출과 밀린 이자 상환이라는 두가지를 경협재개 전제조건으로 제시했으나 이자부분에 상당한 융통성을 보임으로써 이를 타결지었다. 겨울을 앞둔 러시아로서는 소비재차관 재개가 상당한 지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서는 채권확보문제와 관련해 국내 여론에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나 정부는 이의 대가로 러시아의 자원과 첨단기술,안보상의 효과 등을 들어 합리화하고 있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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