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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중앙일보 창간 27돌…세계 석학 특별투고|한국경제 잠재력 있을 때 지속 성장 필요|미 경제학자 존 베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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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국경제 위기 론이 거론되고 있는 국내 실정과는 달리 이같은 한국의 위기 론은 반쯤 채워진 잔을 두고 채워진 반을 강조하느냐, 비워진 반을 강조하느냐는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미국의 한국문제 전문 경제학자 존 베네트 박사가 지적했다. 베네트 박사는 한국의 경제는「술잔이 반만 차 있는 상태」에 비유하고 비어 있는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한국 정치·경제 리더들이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했다. 다음은 베네트 박사가 분석한 한국경제 특별 기고 문이다. 【편집자 주】
낙관론자냐 비관론자냐의 차이는 반쯤 채워진 잔을 놓고 볼 때 채워진 반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비워진 반을 강조하느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들의 경우 경제 문제에서는 비관론자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최근의 경제사정이 엉망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꼽는 문제점도 인플레이션·무역적자·임금인상·산업전반의 기술적 낙후·불공정한 소득재분배·경제전망 불투명 등 실로 다양하다.
이런 시점에서 경제학에 조예가 깊고, 한국 경제에 우호적일 뿐 아니라 한국경제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정확치 꿰뚫고 있는 외국인의 말에 한국 내 비관론자들도 한번쯤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현명할 것이다.
한국 경제의 긍정적인 면(채워진 반)을 먼저 살펴보고 비판(채워지지 않은 반)을 검토해 보겠다.
한국의 상품 및 서비스 생산은 지난 53년 이후 2년을 빼고는 계속 성장세를 보여 왔다. 그 2년은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경제에 제동을 걸었던 1956년과 제2차 오일쇼크에다 농산물 흉작,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에 따른 정치적 혼란이 겹친 1980년이다. 이기간에 한국만큼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한 나라는 거의 없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이 한국의 성장비결을 배우려고 안달했다.
특히 한국의 경제 성장속도는 아주 빨랐다. 한국전 종전직후부터 1965년까지는 급 성장했으며, 그후에도 5∼14%선은 유지해 오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한국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한 국가는 극히 드물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해 냈을까. 먼저 높은 투자율을 꼽아야 한다. 이 기간 국내총생산에 대한 투자비율은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한국이 이처럼 투자율을 높게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나. 높은 국내 저축률이 첫째 비결이다. 이 저축에는 각 개인 외에도 기업·정부들이 적극 참여했다. 두 번째는 국내 저축으로 필요한 투자를 다 충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채를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의 무역 적자가 높았고 지금도 여전히 높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 번째 비결로는 투자를 현명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생산증대를 이룰 수 있었다. 비록 많은 한국인들간에 한국이 과거처럼 효율적인 성장을 이루는데 필요한 기술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지만 통계를 보면 그렇지 않다. 각종 통계에서는 오히려 한국이 지금도 과거처럼 투자에서 평균이상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두드러진 성과는 국민들의 평균복지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잘 입증되고 있다. 국민 일인당 생산량과 근로자일인당 평균생산량의 증가가 그것이다.
이외에 교육·주택·국민보건·가계소득 등 다른 통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부문의 변화 상을 일일이 나열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래서 이 변화상의 전반적 이해를 가능케 하는 실업률과 임금부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부문 역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실업률은 계속 떨어져 왔으며 지금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낮다.
근로자들의 실질임금도 80년과 81년을 제외하고는 지난 작년이후 줄곧 향상됐으며, 특히 최근 5년 동안 그 정도가 두드러졌다. 이같은 현상은 다행스런 것임에 틀림없다.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개선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임금 인상은 생활비 인상이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도 낳았다. 그 결과한국의 전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약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기업체들은 새 상품 개발로 눈을 돌려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도산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임금 묶기 어려워>
실업률 통계는 한 국가의 경제 성장에 따른 혜택에서 소외된 인구를 측정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 실업률통계도 불완전 고용이나 농민,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결함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농업인구의 급격한 감소나 일부 산업분야의 근로자 부족현상을 볼 때 노동 능력을 가진 사람이 취업을 희망할 경우에는 직장을 가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한국경제의 부정적인 면은 아마 인플레이션일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인플레이션이 과거 평균 생활수준 향상에 장애 요소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경제성장을 저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플레이션은 단지 고정수입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만 구매력 약화와 생활수준 저하의 고통을 줄뿐이었다. 여기서도 한국의 경우 고정수익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은퇴를 해도 대부분 돈을 버는 가족·친지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인플레이션에 관한 가장 심각한 불만은 한국에서 인플레이션이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지적일 것이다. 한국은 지난 83년부터 87년까지 비교적 낮은 인플레이션 율을 기록했지만 현재는 높은 인플레이션 율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임금인상은 크게 억제되었다. 임금 통제는 노동조합의 활동, 즉 조합결성, 집단행동, 파업 등을 불법화하는 형태로 곧장 나타났다.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은 과거 노동시장에 직접 개입하던 정부의 능력을 파괴해 버렸다. 이에 따라 노사분쟁이 더욱 보편화됐다. 비록 지난 88년이래 근로자들의 파업이 격감했지만 기업가들이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압력에 무력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정부는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려고 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노동시장에서의 노동력 공급부족으로 노동자들의 요구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가 아주 쉬웠으며 고용주들은 새 노동자를 구하기가 어렵고 임금도 무척 비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곤경을 극복하는 방안은 경제성장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노동시장에서의 수요공급 불균형을 해소하고 임금을 생산성과 걸 맞는 수준으로 묶어 둘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89년 하반기 성장이 늦어지는 듯 하자 정부에 성장촉진 정책을 마련하라는 압력이 늘어났다.

<새 상품 개발 절실>
86∼88년 사이 이루었던 두 자리 수 성장이 89년에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격렬한 비난이 일었다. 그 결과 성장 촉진 책이 실시됐으며 임금인상을 자극하는 인플레도 계속됐다.
임금 상승은 또 한국 수출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빚어냈다. 소득 증대에 자극을 받은 수입이 계속 증가했다. 소비가 늘고 저축률이 감소했으며 그 결과 외채가 증가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미래의 성장을 희생시키는 것을 대가로 하는 투자억제 뿐이었다.
임금정책 이외의 다른 한가지 새 정책이 인플레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여 놓았다. 한국에서는 소득이 증가하면 주택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주택 2백 만호 건설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그러나 건설투자는 수출상품 생산을 위한 기계설비 투자에 비해 생산성이 크게 떨어진다. 그 결과 투자율이 높은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더욱 더 투자를 증대시켜야만 했었다.
한국에서 소득분배 문제는 지난 수년간 계속해 논쟁을 불러 일으켜 왔으며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통계수치들은 70년대에 걸쳐 소득분배구조가 악화됐지만 그 이후 개선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특정한 사람들이 너무 부자라는 것이 아니라 빈곤층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빈곤층들은 빠른 성장의 혜택을 크게 입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빈곤의 기준 역시 높아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말한다. 이 말은 빈곤의 기준이 평균소득의 증가에 따라 높아지는 경우 언제나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평등을 중요시하는, 응집력 강한 사회에서는 소득 불균형이 확대되면 분열이 일어난다. 그러나 결국에는 소득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성장을 희생시킬 것인지 여부에 대한 선택이 불가피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성장을 원했으며 빈곤층도 성장의 혜택을 보리라는 것을 믿어 왔다. 내 판단으로는 소득분배 문제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져 야하지만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고려할 때 빠른 성장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다. 5% 이하의 성장이 당연해지는 단계에 가서 소득분배에 대해 더 많은 고려를 해야 할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기아를 방지하고 전쟁피해를 복구하며 발전을 이루는 것을 돕기 위한 원조 프로그램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은 막았지만 발전을 이룬 나라들의 숫자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뿐이다. 한국은 이들 선택된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은 지난해 1인당 국민 총생산(GNP) 6천5백 달러를 달성했다. 앞으로 6년 이내에 2배가 된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가능할 것인지를 의심하고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를 알 수 있다.
경제 성장은 투자와 신기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국이 투자를 확대하고 새롭고 복합적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시장을 만들어 내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기술보다 월등한 기술을 가져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과거 한국은 이를 위해 외국 기술을 도입하고 이를 한국상황에 맞게 변용 시켜 왔다. 일본이나 미국에는 1인당 GNP수준이 비슷한 유럽 국들에 비해 한국이 도입할 만한 기술들이 많이 남아 있다 .최고도의 기술들은 도입비용이 매우 비쌀 것이지만 자체 개발하는 것보다는 쌀 것이다.

<생산성 향상 중요>
한국이 자체 기술개발을 해야만 하는 시기에는 성장률은 선진국 수준인 2%내지 5%에 그칠 것이다. 이 시기는 한국의 1인당 GNP가 2만 달러에 달하게 되는 수년 뒤의 미래가 될 것이다.
한편 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국은 꾸준치 노동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활용되지 못하는 신기술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기술의 활용은 야망이 크며 교육을 많이 받은, 근면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노동자·기업가·정부는 모두 예전처럼 노동자 재교육에 책임을 지고 있다.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은 명확하다. 술잔은 반만 차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공짜 점심은 없다』는 밀턴 프리드만의 교시를 잊지 않고 있다. 바람직한 모든 것은 그 대가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은 여러 대안 중의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한국은 최소한 앞으로 10년 이상 성장지향 정책을 선택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원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따라서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958년=미 버클리대 농업경제학 박사.
▲55년=미 국무부관리, 네덜란드·베트남·튀니지 등 주재 미 대사관에 근무.
▲75∼78년=주한 미국 대사관의 경제 및 무역담당 참사관.
▲79년=워싱턴 육군대학의 국제학과 과장.
▲81년=한국경제연구소(KEI)를 설립, 현재 이사로 재직 중.
▲91년∼현재=조지 워싱턴대학 및 국무부 외교연구소 등에서「한국 경제개발」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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