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세금 떠넘기기의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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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금은 내가 내는 게 아니다. 힘없는 사람들(little people)이 낼 뿐이다." 리오나 헴즐리라는 여성이 1983년에 한 얘기다. 그녀는 경제학자나 정치인이 아니다. 사업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업원들을 혹독하게 다뤄 악명이 높지만, 호텔과 부동산으로 거금을 번 사업가다. 한때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주인이었으며, 지난해 팔순의 나이에도 포브스지 선정 '미국의 400대 부자' 명단에 오른 인물이다. 뉴욕 타임스 보도로 유명해진 이 말처럼 세금의 속성을 잘 간파한 말도 없다. 무슨 세금이든, 누가 세금을 내든, 결국 그 세금을 마지막에 떠안는 사람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지난 한 주 동안 대권 후보들의 검증 공방만큼이나 뜨거웠던 기름값 논란에도 헴즐리의 한마디가 숨어 있다. 국내 휘발유 값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L당 1800원에 육박하자 정부는 정유사에 책임을 돌렸다. 국제 원유가를 핑계로, 정제한 기름을 판매하면서 너무 많은 마진을 챙긴다고 지적했다. 휘발유의 경우 올 들어 정유사가 챙긴 마진이 59%나 늘어났다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정유사들은 펄쩍 뛰었다. 벙커C유처럼 손해 보는 기름까지 합치면 정제 마진은 1.6% 정도에 불과하며, 정작 기름값이 비싼 이유는 공장도 가격의 60%를 차지하는 세금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양측의 공방은 정유사들이 꼬리를 내리고 기름값을 소폭 낮추는 선에서 봉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름 소비자들은 휘발유 값에는 교통세.교육세.주행세 등 세금이 잔뜩 붙어 배보다 배꼽이 큰 구조이며, 지난해 정부가 거둔 유류세 수입이 25조원으로 전체 국세 수입의 18%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유사들 역시 공장도 가격을 원유 시세보다 높게 올리면서 주유소용 마진까지 챙겨 주고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정부의 세수나 정유사들의 마진이 결국은 힘없는 소비자들의 희생 덕이라는 현실을 파악한 것이다.

비단 유류세뿐이 아니다. 정부는 해마다 세금을 늘리고, 기업은 제품 가격이나 요금 등을 적정 폭보다 올려 받는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늘어난 세 부담을 떠넘기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유류세처럼 물품 구매자와 세금 내는 사람이 다른 간접세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재산세나 종합부동산세 같은 직접세라고 예외는 아니다. 집주인은 세입자나 집을 사려는 사람에게 세금을 떠넘기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금이 늘어날수록 사회적.경제적 약자의 부담은 가중되게 마련이다.

일찌감치 '작은 정부'를 포기한 노무현 정부 들어 재정지출과 공무원을 펑펑 늘리는 동안 개인들의 세금 부담은 크게 늘어났다. 지난주 발표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의 세금 부담은 2002년 24조9000억원에서 지난해 39조5000억원으로 60% 가까이 늘어났다. 그동안 국민총소득(GNI)은 24%, 1인당 GNI는 22%(명목 기준) 늘어났으니 세금이 소득 증가폭을 두 배 이상 웃돈 셈이다. 이런 지표에 숨어 있는 세금 떠넘기기가 노무현 정부 들어 계층별 양극화 현상을 훨씬 악화시킨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세금을 떠넘기는 조세 전가(轉嫁)의 끝은 어디일까.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정부나 정치인, 기업들의 '영원한 봉'인가. 반드시 그렇진 않다. 세금은 법률에 근거하는 만큼 부당하게 세금을 남에게 떠넘기는 사람이나 기업은 법으로 처벌받는다. 자신이 내야 할 세금을 이리 저리 떠넘긴 리오나 헴즐리도 탈세 판결을 받고 징역을 살았다. 세금을 너무 많이 매기거나 거둔 세금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정부.정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약자든, 강자든 누구나 한 표씩 주어지는 민주주의로 응징할 수밖에 없다. 올해는 마침 선거의 해다. 생활비는 줄여도 꼬박 꼬박 세금은 내 온 '힘없는 사람들'이 6개월 뒤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손병수 경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