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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롬멜'…승자의 역사에서 敗者 롬멜은 신화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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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거기서 패자는 다행스럽게도 잊혀지거나, 아니면 추하게 왜곡된다. 그러나 때로 그 승자의 기록이라는 합당한 폭력 속에서도 살아남는 인물이 있다. 신화가 되는 사람들 말이다. 롬멜도 그 가운데 하나다. 2차 세계대전의 전사(戰史)에서 가장 인상적인 독일 기갑부대의 사령관 롬멜.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으로 불린 그는 적국의 총리인 윈스턴 처칠조차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처칠은 1942년 의회 연설에서 롬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긴다. "나는 이 자리에서 현재 아프리카의 키레나이카의 서부 전선이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대에게는 무척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군인인 그가 처음에는 군인의 길을 내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항공 기술자가 돼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롬멜. 그러나 보수적인 부모의 완고한 고집을 꺾지 못한다. 가문의 전통처럼 교사가 되거나, 아니면 군인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마침 새로운 제국의 수립과 함께 직업장교가 인기 직종으로 떠오른 때였다. 롬멜은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고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롬멜은 지휘관으로서의 카리스마와 함께 부대원들을 하나로 묶는 통합력을 보여준다. 그 증거가 알프스의 이탈리아 군대를 격파한 일이다. 소수의 정예 병사만을 이끌고 적의 예상을 뒤엎는, 무모할 만큼 과감한 공격으로 놀라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경험은 뒤에 '보병공격술'이라는 군사 교본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되살아난다.

물론 그에게 순탄한 성공의 길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민 출신인 그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싸움터에서는 유능한 장교였지만, 중앙의 참모본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에는 서투른 시골뜨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평범한 군인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의 개인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국 패했고, 그 결과 10만이라는 소규모의 군대만을 보유할 수 있었다. 진급은 더뎠고,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잔인하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롬멜을 구원해 준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다. 패전국의 절망을 곱씹고 있던 독일 국민에게 적에 대한 증오의 불길과 함께 민족적 자부심을 불어넣은 히틀러. 그는 강력한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고, 롬멜은 당연히 히틀러에게서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 롬멜과 히틀러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어쨌거나 롬멜의 능력을 꿰뚫어보고 뜻을 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히틀러인 것이다.

그러나 롬멜이 처음부터 히틀러와의 학살 전쟁을 꿈꾼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신은 믿어도 좋을 것이오"라고 그는 썼다. 그는 단지 절망에 빠진 조국을 재건하는 데 있어 히틀러가 보여준 역할과 능력에 우선 매혹됐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순수한 군인이었던 그가 더러운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치의 정치적 과오를 롬멜에게 곧이곧대로 들이댈 수는 없다. 그는 군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싸웠고, 자신을 인정해 준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북아프리카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는 동안 독일군은 거기서 단 한 건의 반인륜적 범죄도 일으키지 않았다. 유럽의 대륙에서 벌어지는 학살은 그에게는 단순히 적의 선전선동으로 비칠 뿐이었다. 포로를 사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그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현지의 유대인들에게 그 어떤 위해(危害)도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진실을 알고 난 뒤에 히틀러와 거리를 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조국의 부흥을 위해 히틀러를 선택했지만, 그로 인해 조국의 파멸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는 돌아선 것이다. 불행하게도 롬멜은 조국을 위해 다시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그는 히틀러의 암살계획이 발각되면서 강요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자신의 성취욕을 만족시켜준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악인일까, 아니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합치될 수 없었던 불행한 운명을 산 군인일까?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재단되지 않는 이 강렬한 인간 드라마에서 나는 인간과 삶과 역사의 무서운 아이러니를 읽는다.

박철화 <문학평론가>

***북 마크

'아들에게는/ 무분별하게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사과하라고 가르치는 아버지/ 남들이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귀 기울여주는/ 그런 아버지가 필요하다.'-아동 발달에 관심이 많은 미국의 저자 그레고리 E 랭의 '아들에게 아빠가 필요한 100가지 이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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