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클린턴 겁내야한다/문창극 워싱턴특파원(특파원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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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집권하면 대한정책 변할까 조바심/이젠 국력 커진만큼 자존심 지켜야
최근 워싱턴을 방문한 국회 외무위 국정감사팀은 국정감사 대신 클린턴의 집권에 대비한 대책을 묻기에 바빴다.
서울에서 국회외무위의 국정감사 정책질의때도 민주당이 집권할 것에 대비한 정부측의 대책을 추궁하며 정부가 미리 민주당인사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은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또 언론은 언론대로 클린턴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논조를 펴고 있고 기업은 기업대로 민주당이 집권할 때를 상정,누구 줄을 붙잡아야 하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자연히 민주당 집권시의 대한정책 변화와 클린턴행정부의 요직에 등용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에도 초점이 쏠리고 있다.
이러한 반응들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12년간 공화당 집권에 익숙한 우리로서 새로운 변화에 미리 준비하자는 원로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에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공화당과는 달리 대한정책이 급격한 변화가 오지 않겠느냐는 전제를 무의식중에 깔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기억속에는 70년대 지미 카터민주당대통령시절의 한미관계가 깊숙이 박혀있어 당시의 불편했던 상황이 재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기는 하다.
실제로 우리의 외무부조차도 국회의 정책답변에서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주한 미군이 영향받으며 한미간 무역마찰이 공화당에 비해 심해질 수 있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과연 민주당이 집권하면 대한정책에 많은 변화가 오고,그것도 일부에서 우려하듯 민주당 정부가 한국에 불리한 쪽으로 정책을 바꿀 것인가.
한국과 가장 관계가 불편했다던 카터시대를 되돌아 보아도 분명히 그렇게 되리라는 예측은 할 수 없다.
카터는 인권외교를 내세우며 박정희대통령의 유신체제가 인권을 탄압하는데 대한 불만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 의회의 진보파들도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줄이거나 없애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카터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한국이 고와서가 아니라 주한미군의 철수가 동북아에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결정적으로 훼손한다는 결론때문이었다.
이상주의 외교를 표방한 카터 역시 외교정책은 미국의 국가이익을 우선해 결정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승복한 것이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그들의 국가이익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집권당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면 미국의 정권변화에 그토록 노심초사할 필요가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은 미국에 원조를 받는 나라도 아니며 인권을 탄압해 국제적으로 눈총을 받는 나라도 아니다.
한국은 또 러시아·중국과 수교한 동북아의 핵심국가이며 미국의 일곱번째 무역상대국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오히려 미국에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동북아에서의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원만한 관계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돼 있고 이러한 생각이 미국의 외교정책 실무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신은 이같은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20년전의 잣대로 한미관계를 측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있었던 클린턴 편지파문을 들으면 더욱 부끄럽다.
얼마전 어느 작은 나라의 야당 지도자가 워싱턴을 방문,부시를 만났다면서 부시와 함께 찍은 사진을 그나라 언론에 실어 파문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백악관의 의전규칙상 미국대통령은 야당지도자와 만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이상해서 알아보니 워싱턴시내에 관광객용으로 세워놓은 부시초상화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이 들통났다는 것이다.
클린턴의 편지 한장을 놓고 시비가 벌어지는 우리의 현실을 미국 사람들은 앞의 나라와 비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얼굴이 달아 오를 정도다.
이젠 우리 스스로가 미국에 대해서도 자존심을 가져야 할 때다. 우리는 이제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되든 우리는 우리의 국가이익에 따라,미국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따라 상호 협력을 해나가면 될 일이지 사전에 조바심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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