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법정에 오른 ‘한국 아줌마 계(契) 파산 사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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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성 3명이 파란 눈의 미국 판사 앞에 나란히 서 있다. 판사가 한참 서류를 들여다보다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계’가 무엇입니까?” “…” 때는 2005년 봄. 미국 버지니아주의 파산법원. 나이 지긋한 한국교포 여성들이 계를 하다가 깨진 게 화근이 돼 미국 법정에 섰다. 계주인 강모씨가 파산을 신청하자 하모씨 등 계원 2명이 “강씨가 나중에 돈을 벌면 그동안 우리가 낸 곗돈을 돌려받게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한 것이다.

사실 다른 계원들이 곗돈을 붓지 못해 생긴 일이라 양측 모두 울상이었다.
하지만 더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판사인 데이비드 H 애덤스. 한국 법원의 판사들도 하기 어렵다는 계 분쟁 사건을 엉겁결에 맡게 됐다. ‘강씨 아줌마 사건’으로 불리는 이 판결문을 최근 입수해 기자에게 소개한 임치용(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애덤스 판사가 마음고생을 하며 작성한 결정문을 보면 한국과 미국의 법 문화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그 결정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결정문은 먼저 ‘계(gae)’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미국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금융상품’이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들이 이용하는 전통적인 저축 수단”으로 표현했다.

계주 강씨는 ‘오야(oya)’로 일컬어졌다. 오야는 두목을 뜻하는 일본어. 계원들이 부르던 대로 기재된 것이다. 계를 한 목적도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강씨 등은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 마련이나 가구 구입을 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계원 11명이 매달 1000~2000달러씩 곗돈을 부어 25개월간 운영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모인 2만5000달러(당시 환율로 2500만원 상당)를 탄 뒤에는 매달 100달러의 이자를 내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계원이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로 곗돈을 내지 않으면서 15개월 만에 깨지고 말았다.

재판에 쓰일 증거자료는 계주 강씨가 손으로 쓴 계 장부(handwritten document)밖에 없었다. 곗돈이 오갈 때 아무런 영수증도 주고받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허술할 수 있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애덤스 판사 앞에서 교포 여성들은 “계주를 전적으로 믿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곗돈 내는 것을 미국인이 집을 산 뒤 매달 모기지 내는 것만큼 중요하게 여긴다”고도 했다.

애덤스 판사가 또 한번 놀란 것은 계 장부에 적힌 25개월 중 7개의 이름 칸에 한글로 ‘자기’라고 적혀 있었던 점. 강씨는 “이 중 2개는 내가 탈 돈이지만, 나머지 5개는 다른 계원들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렇다면 왜 ‘자기(myself)’라고 썼느냐”는 판사 물음에 강씨는 “계원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렇게 적어둔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기혼여성은 실제 이름보다 ‘아줌마(Auntie)’로 불린다고 한다. ‘아줌마’로 불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장부에 ‘자기’라고 썼다는 것이다.”(결정문 중)
애덤스 판사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계 장부를 증거로 채택한 뒤 결론을 내린다.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나, 채무자 강씨가 파산을 신청한 곳은 미국 법원이다. 미국 파산법에 따라 계주 강씨는 받은 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이 받은 4만8000달러를 어디에 썼는지 그 어떤 장부도, 영수증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채무 면책을 해줄 수 없으므로 강씨는 빚을 갚아야 한다.”

만약 계주 강씨가 한국에서 파산했다면 면책이 될 수 있을까. 임치용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파산 신청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한다. 임 변호사는 지난 2월까지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서 부장판사로 근무하다 퇴직한 파산법 전문가다.

임 변호사는 “우리나라 판례는 계주가 의도적으로 계를 깬 경우에만 면책이 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고 말한다. “강씨처럼 계원들이 곗돈을 내지 않아 계가 깨졌다면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 책임을 지지 않고, 면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법 문화에 있어 결정적인 차이는 기록을 얼마나 정확히 남기는지다. 만약 강씨가 돈 사용처를 장부나 영수증으로 밝힐 수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임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채무자에게 포괄적인 서류 보관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며 “문서를 어느 정도 중시하는가 하는 법률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간 거래에 반드시 서류를 남기는 문화는 그나마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 앞으로 거래가 잘 이뤄질 것이란 전제가 중심을 이룬다. 분쟁이 생길 경우에 대비한 프로
그램은 구체적으로 기재해 놓지 않는다. ‘잘하자고 시작하는 마당에, 잘못될 때를 가
정해서야 되겠느냐’는 식의 동양 문화의 산물이다.

한국과 미국의 파산제도를 살펴보아도 미국 법 제도가 우리에 비해 안정적이고 체계적임을 알 수 있다. 미국 파산법은 ▷채권자 권리 방해 ▷재산 양도ㆍ은닉 ▷관련 기록 위조 등 면책 불허가 사유가 있을 경우 법원이 재량으로 면책해줄 수 없도록 돼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법원의 재량권에 제한이 없다. 지난해 4월 시행에 들어간 통합도산법은 “면책 불허가 사유가 있더라도 파산에 이른 경위 등 기타 사정을 고려해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면책을 허가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과거 법원 실무에서 인정돼 오던 재량 면책을 명문화했다.

이에 따라 199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인파산 선고가 내려진 이후 면책률은 2000년 57.7%에서 지난해 97.9%로 6년 만에 두 배 가까이로 치솟았다. 파산 신청자 수도 2002년 처음으로 1000건을 넘어선 데 이어 지난해에는 12만3691건으로 폭증했다. 그러나 100%에 가까운 면책률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법원은 지난 3월 개인 파산ㆍ면책에 대한 사전 심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법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법원이 면책 심사를 강화해 면책률을 떨어뜨리게 되면 결국 법적 안정성을 해치게 된다”며 “면책 기준에 관한 분명한 가이드라인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권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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