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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든 최루탄, 이제는 수출만 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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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항쟁 20주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최루탄도 새삼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6.10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1987년 6월9일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고 이한열군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었다.

신세대 네티즌들은 이 사건은 물론 최루탄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포털사이트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

최루탄이 시위 현장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지난 98년.

당시 만도기계 파업 시위 현장에서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99년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이에 앞서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었다. 문민 정부 시절이었다. 그러나 말에 그쳤을뿐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과 돌멩이, 그리고 각목과 함께 최루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최루탄은 코와 눈물샘을 자극해 시위대를 무력화시키는 일종의 화학 무기.

성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5~6 종류 정도의 생체 자극요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이 시위 진압용 최루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중학생 김주열 군의 사인은 눈에 박힌 최루탄 통이었다. 이루 미루어 보아 최루탄은 이미 1960년대 이전의 시위에서도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루탄의 전성 시대는 80년대. 당시 집권의 정당성 논란으로 시위가 끊이질 않았던 5공화국 내내 대학가에는 최루탄 냄새가 잦아들 날이 없었다.

1988년 당시 최루탄 최대 생산업체였던 삼양화학의 한영자 사장은 소득세 납부 실적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당시 세간에는 시위가 격화되던 필리핀에서 우리 최루탄을 수입하려 하다 지나치게 인체에 유해하다며 취소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6.10 항쟁 직후 6.29 선언을 계기로 도입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출범한 6공화국에서도 최루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시민단체들이 잇따라 최루탄의 폐해를 지적하자 경찰들이 시위대가 화염병과 돌 투척 행위를 하지 않을 경우 최루탄 사용을 자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시위 현장을 담은 기록사진들에는 전투경찰들이 '無石無彈'(돌을 던지지 않으면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의 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많이 담겨있다.

또 6공화국 시절 삼양화학은 시민단체들의 항의로 최루탄 생산을 중단하고 가정용 합성세제 제조업체로 변신했다.

5공화국 당시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최루탄 제조업체들은 정부의 최루탄 사용 자제 방침에 따라 그 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지금 최루탄을 생산하는 업체는 대광화공이 유일하다. 불꽃놀이나 폭죽 같은 화약류 제조업체인 이 회사의 관계자는 최루탄 제조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 곤혹스러운 듯 "시위 진압용으로 동남아시아와 중동 지방으로 수출한다"고만 밝혔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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