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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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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학을 나온 내 또래의 한국인들이 대개 그렇듯 나는 '정통종합영어' 세대다. 송성문 선생의 불후의 명저(名著)-나는 감히 명저라고 단언한다-인 '정통종합영어'는 영어에 관한 한 우리 세대의 바이블이고, 등불이고, 나침반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정통종합영어'를 펼쳐들었다. '정통종합영어'에서 출발한 행복한 고난의 행군이 '1200제'를 거쳐 '영어의 왕도'에서 마무리될 무렵 우리는 정든 교정을 떠나 대학생이 됐다. 벌써 30년 전 얘기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에 들어와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가끔씩 해외 취재를 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외신을 참고하며 글을 써서 식구들 밥 굶기지 않고 있는 것도, 몇 년 전 미국에 연수를 갔을 때 어학 '필기시험'에서만큼은 '괴력(怪力)' 성적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정통종합영어' 덕분이다.

하지만 지금도 내 영어는 반편이 신세다. 읽고 쓰는 문어(文語)라면 웬만큼 자신이 있지만 듣고 말하는 구어(口語)에서는 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간단한 표현이 생각이 안 나 같은 말을 엿가락처럼 늘이며 '버벅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제 딴엔 버터 발린 발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머리를 갸우뚱할 때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막 없이 미국 영화를 보다 중간에서 그만둘 때면 한심한 생각도 든다. 영어로 자유자재로 말하며 웃고 떠드는 젊은 후배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일 뿐,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용물이 훌륭해도 그릇이 없으면 못 담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둘 다 맞는 얘기라고 본다. 아무리 고상하고 심오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 제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내용이 공허하면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 국민이 영어 학습에 쏟아 붓는 사교육비만 한 해 14조원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영어 능력은 아직 부끄러운 수준이다. 미국의 토플(TOEFL) 시험 주관사인 ETS 발표에 따르면 한국 응시자들의 평균점수는 213점(CBT 기준)으로 세계 148개국 중 103위다. 영어에 들이는 시간과 돈에 비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아예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나는 반대다. 자칫 뿔을 자르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기 쉽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없을까.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우선 24시간 영어로 뉴스만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을 정부가 만들라는 것이다. 프랑스에 가면 '프랑스앵포'라는 라디오 뉴스 전문 채널이 있다. 24시간 프랑스어로 뉴스만 방송한다. 15~30분 단위로 업데이트하다 보니 반복되는 뉴스가 대부분이다. 파리특파원 시절 내 귀가 뚫리고 말문이 열린 것은 순전히 '프랑스앵포' 덕분이었다. 국내외 뉴스를 영어로 24시간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이 생긴다면 우리 국민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면서 시사정보 능력도 높이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동시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정보 욕구도 충족시켜줌으로써 한국의 국제화 수준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기존의 아리랑 방송을 활용한다면 돈도 많이 필요 없다.

또 하나는 지상파TV 채널의 외화 프로그램에서 더빙을 없애라는 것이다. 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든 영어로 제작된 프로그램은 한글 자막을 달아 모두 원어 그대로 내보내면 영어 청취력과 발음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토플 성적에서 늘 최상위권인 덴마크.네덜란드.핀란드 같은 유럽 국가들은 모두 이 방법으로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이 또한 영어식 표현이지만, 영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 해에만 1000만 명 이상의 우리 국민이 해외여행을 떠나고, 대부분의 비즈니스와 국제회의는 영어로 이루어진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영어의 굴레다. 더 늦기 전에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