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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 문제만 푸는 수능 공부에 지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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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 앨토의 스탠퍼드대 교정에서 박재만(전자공학 석사과정).윤치형(컴퓨터공학 석사과정).이성훈(생명공학4).노현우(전자공학 박사과정.왼쪽부터)씨가 미국 유학을 오게 된 이유를 얘기하고 있다.

프린스턴대 2학년 원신재(21.여)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미국 유학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부친을 따라 미국에 와 초등학교 4.5학년을 다니고 한국에 돌아간 직후부터 한국 '탈출'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원씨는 "토론하면서 원리를 이해하는 미국 교육과 시험 공부만 하는 한국 교육을 순간순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열린 교육'을 외치지만 정작 열린 교육이 뭔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고 공부도 전교 수위권이던 원씨는 민족사관고로 진학해 미국 명문대로 유학을 갔다. 프린스턴대 학보사에서 사진 편집장을 맡고 있는 원씨는 "국제기구에 진출해 해외 경험을 쌓은 뒤 민족사관고 교사가 돼 후배들의 유학을 돕고 싶다"고 했다.

예일대 1학년 박진곤(20)씨는 "한국 대학에 갈 생각은 애당초 없었고, 유학을 가려면 차라리 일찍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한국에서 고교에 다닐 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쓰는 게 아니라 시험문제 풀이용 공부만 하는 국어 수업이 정말 싫었다"며 "한국 학교에서는 내 생각을 글로 제대로 써 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경기고 1학년 때 미국 보딩스쿨(기숙학교)로 유학을 왔다.

대부분의 유학생은 입시 위주의 획일적 한국 교육을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중 일부는 어렸을 때 미국 교육을 경험해 한국과 미국 교육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 학교를 벗어난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 조기유학생 출신은 한국 학교생활을 "끔찍했다"는 말로 대신하기도 했다.

서울의 한 외국어고 유학 지도교사는 "국내 대학을 나오면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국제적인 무대에서 써먹을 수 있는 재주를 배우지도 못하기 십상"이라며 "학부모들이 대학 진학 때 어차피 사교육비가 든다면 미국 대학 진학을 위해 돈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암기 교육 싫어 떠났다"=매사추세츠공대(MIT) 1학년 백진수(20.여.건축학)씨는 "중학교 1학년 때 학원에서 중3 교과 내용을 무작정 외우는 식의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부모님을 졸라 미국에 왔다"고 유학 동기를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예술고를 거쳐 미대에 가려고 했다"는 그는 "고교 방학 때 한국에 가보니 예술고에 간 친구들은 기계처럼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3 때 유학을 떠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나온 보딩스쿨인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를 졸업했다. 백씨는 "흥미 있는 과목만 집중해 공부하면서 다양한 클럽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고교 시절을 평가했다.

UC버클리 졸업반 김원(23.여.경제학)씨도 부친의 해외 근무로 미국 교육을 경험한 뒤 한국 교육에 실망해 미국 유학을 결심한 케이스다. 그는 "초등학교 때 다닌 미국 학교와 그 뒤에 다닌 한국 학교는 너무 달랐다"며 "반복해 문제만 푸는 수능시험 공부가 싫어 고교(과천외고) 때 혼자 유학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쌍둥이 유학생 안재우.재연(21) 형제. 2005년 나란히 하버드.코넬 등 11개 미국 대학에 합격해 화제가 됐고, 지난해 '쌍둥이 형제, 하버드를 쏘다'라는 책을 낸 인물들이다.

안재우씨는 "교과서를 외우는 공부가 싫었고, 벼락치기 시험 공부만 할 바에야 영어도 배우면서 건강하게 자라겠다는 생각으로 떠나 왔다"고 했다. 형제는 전주 해성고를 다니다 200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벨리포지 사관고로 나란히 유학길에 올랐었다. 안씨는 "성적이 전교 20~30등 수준이었고 동생도 비슷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벨리포지에서 육상부와 축구부의 주장을 맡으며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 높이 평가받아 입학허가를 받았다. 안씨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해 한국에서는 운동을 제대로 못해봤는데 미국 학교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

◆"한국 대학도 문제 있다"=유학생들은 한국 대학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하버드대 4학년 이준석(21.컴퓨터공학)씨는 "서울대 학생들이 우리과 학생들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며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컴퓨터 전공자들과 달리 경제.정치 등 다양한 수업을 통해 기술자를 활용하는 리더의 능력을 배운다"고 말했다.

스탠퍼드대 학.석사 통합과정에 재학 중인 박재만(25.전자공학)씨도 "많은 미국 대학에는 한국과 같은 별도의 교양과목이 없고 다른 과의 전공과목을 교양 수업으로 듣는다"며 "수업의 토론에 참여하려면 책을 여러 권 읽고 가야 하지만 수업을 듣고 나면 그만큼 시야가 넓어졌음을 느낀다"고 했다. 하버드대 3학년 이상준(22.사회학)씨는 "교수가 과제물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지적해 놀랄 때가 많다"며 "한국 대학의 '족보'(선배들이 물려주는 강의와 출제 내용 핵심 정리집)는 여기서는 상상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교수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을 지적하는 학생도 있었다. 서울대 출신으로 UC버클리 대학원 유학생인 K씨는 "(이곳에서는) 주말이나 방학에도 실험실로 꼬박꼬박 나오는 교수가 한둘이 아니다"며 "한국에도 그런 교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적인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명문대 교수들의 한국 교육 평가

미국 명문대에서 만난 입학사정관과 한국인 교수들은 한결같이 한국 교육을 걱정했다. 한국인 유학생이 늘어나는 것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국의 대학들이 학생들에게서 외면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취재팀은 지난달 미국 캠퍼스 세 곳에서 이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예일대 피터 셰머리 입학사정관, 스탠퍼드대에서 6년째 사회학을 강의 중인 신기욱 교수, 하버드대 교환교수로 나가 있는 서울대 장덕진(사회학) 교수 등이다.

피터 셰머리
점수로 포장된 학생 우린 원하지 않는다

한국 고교생이 매년 100명 정도 지원한다. 학생의 자질은 무척 우수하다. 대부분 SAT(미국 수학능력시험) 성적 등 흠잡을 데가 없다. 최근 들어 특히 과학고.외국어고.민족사관고 출신 등 우수한 학생층이 굉장히 두터워졌다.

그들은 리더십이나 창의성 교육보다 시험 점수와 같은 표면적인 결과에 지나치게 매달리도록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정작 학생들이 어느 방면에 특출한 재능이 있고,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국가 단위의 대입시험이 있는 나라 출신 학생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러나 미국 대학의 입학사정 과정에서 시험은 극히 일부분이다. 미국 대통령을 네 명이나 배출한 예일대는 리더 자질이 있는 학생을 원하지, 점수로 포장된 학생을 원하지 않는다.

신기욱 교수
미국 교육 경쟁력은 학부 창의적 리더 양성이 목표

미국 교육의 경쟁력은 학부에서 나온다. 학생들은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접하면서 창의적 리더로 성장하게 된다. 스탠퍼드대는 17명의 노벨상 수상자 교수가 학부생 교양 수업을 맡는다. 서울대가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가겠다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서울대같이 한국의 리더를 키우는 곳은 철저히 학부 중심으로 운영해야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해 리더가 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대학들은 창의적 리더를 키우기보다 몸집 불리기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한국 대학에선 인문학이 위기라고 들었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진 리더가 사회를 이끈다. 한국 사회를 이끌 리더십 교육에 대해 대학들이 고민해야 한다.

장덕진 교수
한국서 대학이란 공간은 고시·취업 준비하는 곳

하버드대와 서울대 학생들의 자질은 비슷하다. 다만 공부에 대한 집중도에 많은 차이가 있다. 이는 분위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학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있다. 대학생이 공부를 하든 과외활동을 하든 모든 삶이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 녹아 있다. 반면 한국 사회는 대학생들에게 진짜 공부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이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안 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은 고시와 취업 준비를 위한 기능을 익히는 곳이 되기 쉽다.

취업이 학생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됐다. 이렇게 된 데는 정부 정책도 문제다. 대학은 공부 잘하는 인재를 뽑아 잘 가르치려고 하는데 교육부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

특별취재팀=이상언·임장혁.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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