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월남파병 반대속 강행 |세계 유례없는 사채동결 조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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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정부(국가재건최고회의)였으니 숱한 시행착오는 불을 보듯 뻔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장군이 벌인 희대의 도박에 동참했던 당사자들은 당시 자신들이 불러일으킨 「새바람」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직을 맡았던 이석제씨(67·전 총무처장관·감사원장)의 회고.

<숱한 시행착오들>
『법사위원장이라 하지만 나는 대학(대구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5·16혁명 직전까지 고등고시 준비를 했던 정도의 실력밖에 없었습니다. 고도의 법학지식은 한태연교수님 같은 석학들께 도움을 받아야 했지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요.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보니 당시 우리나라 법률 거의가 아예 일본어로 돼 있더군요. 한심했습니다. 정부수립때 헌법은 버젓이 우리것을 만들어 놓고는 자유당이다 민주당이다, 신파다 구파다 하고 싸우느라고 하위법령은 옛 조선총독부령을 그대로 쓰고 있더란 말입니다. 정치인들이 정권다툼 하느라고 국민들에게 일종의 죄악을 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각 부처에 법제관을 새로두고 2년 남짓한 기간에 전부 우리말로 뜯어 고쳤습니다. 법사위원장을 마치고 총무처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번에는 국가공무원 채용고시제도가 허점투성이였어요. 부정소지가 많아 몇년간 보완하느라 애썼습니다. 기밀유지를 위해 형무소안에서 시험용지를 인쇄하기도 하고요.』
쾌도난마식의 공권력이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에 불과하던 신생 대한민국 전체를 휩쓸었다. 삐걱거리고 덜컹거리지 않을리 없었으나 박정희는 속된 말로 「개가 제 아무리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고집으로 밀어붙였다. 한일협정·월남파병·3선개헌·한강다리개통·경부고속도로건설….
이중 유신선포 직전인 72년8월3일자로 단행된 「8·3조치(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는 세계역사상유례가 없는 정책결정이었다. 이 긴급조치의 골자는 잘 알려진대로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관계를 이 날짜로 무효화하고 새 계약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채부담에 눌려 허덕이던 기업들에 큰 혜택을 주었고 뒤따라 경기침체가 극복됐음은 물론 1차 오일쇼크도 무난히 넘기는 계기가 되었다. 또 70년대 중화학공업육성과 기업공개시책에도 밑거름이 됐다.

<총리까지 모르게>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유기업경제하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조치』(김정렴 전청와대비서실장)였다. 결국 박정희대통령 개인의 과감성과 그에 걸맞은 독재권력이 확보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조치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김용환 당시청와대비서실장 보좌관(60·현민자당의원)의 회고.
『사안이 워낙 중대한 지라 준비작업의 전모를 알고 있던 사람은 박대통령과 김정렴비서실장·남덕우재무장관·김성환한은총재, 그리고 나, 이렇게 5명뿐이었어요. 국무총리도, 정보부장에게도 비밀이었습니다. 화폐개혁이라면 기밀이 새 나갔을 때 아예 없던 일로 취소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사채동결은 문제가 다릅니다. 발표이전에 사채가 회수되기 시작하면 기업들은 연쇄부도가 나고 국가경제는 하루 아침에 폭삭 무너지지요. 특히 최종 인쇄과정은 김정렴실장까지 몰랐을 정도입니다. 각하와 나만 알고 있었어요.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에 1분에 42장 나오는 수동식인쇄기 4대를 들여놓고 두달가량 작업을 했지요. 나와 필생 2명, 여성타이피스트 1명이 집에도 못가고 꼬박 일했습니다. 혹시 기계가 고장나면 어떡하나 해서 사전에 1명을 인쇄소에 보내 수리기술을 익혀놓도록 했고요. 지금 생각해도 목숨을 건 보안조치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전 법안의 입안과정에서는 홍은동 우리집과 서울시내 조선호텔등지에서 위장차트까지 갖춰놓고 논의를 했었지요. 결국 긴급조치는 성공했고, 박대통령으로부터는 보안조치가 특히 잘 됐다고 칭찬받았습니다. 8·3조치로 고통당한 예금자도 많았지만 나 중에 그분들께도 이익이 돌아가는 정책이 시행됐어요.』
그러나 문자 그대로 칼같은 결단력과 미래에 대한 비전제시로 60, 70년대를 이끌었던 박정희의 행동력은 70년대 중반을 고비로 무디어졌다.

<회초리 지도자론>
70년대에 청와대대변인과 문공장관을 차례로 지낸 김성진씨(61)의 말.
『박대통령은 평소 「지도자는 한 집안의 어른이다. 새벽 같이 일어나 등뒤에 회초리를 들고 집안을 둘러보다 늦잠자는 사람에게는 호통을 쳐야 한다. 그러나 회초리를 휘두르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런 점에서 나는 그 분이 유교적인 가부장적 지도자라고 봅니다. 그런데 박대통령도 말년에는 세상의 변화에 즉각 대응하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 듯합니다. 특히 경제발전으로 중산층이 늘어나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시작한 점을 과소평가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박대통령의 말년에 대해 측근들은 대체로 79년 10월말로 잡혀 있던 개각과 당시 비밀리에 진행중이던 유신헌법 개정작업등이 보다 당겨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매사가 명쾌히 돌아가는 서부영화·사무라이영화를 애호한 대신 현대산업사회의 병리를 고발한 영화 「미드나이트 카우보이」는 이해조차하려 하지 않았다면 박대통령은 역시 흙투성이로 땅을 일구고 뒷사람을 위해 길을 닦는 개척시대에 맞는 지도자가 아니었을까. <허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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