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의 선거 발언, 이제 묵살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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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에게 대통령은 있는가. 2일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한 연설을 보면서 그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날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소수 극단주의자 모임의 지도자에 불과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증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이제 집권당에서마저 소수로 몰려 격렬 추종자만 모아 무려 네 시간 동안 푸닥거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오히려 안쓰럽다.

임기가 몇 달 남지도 않은 터에 이렇게까지 막가자고 나오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 현 국면을 흔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2004년 탄핵 심판 이후 총선에서 엄청난 이익을 챙겼던 추억을 재현해 보겠다는 궁리다. 사실 이런 의도적 흰소리까지 논평해야 할지 자괴감마저 느낀다.

그의 발언은 명백한 공직선거법 9조, '공무원의 중립 의무' 위반이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탄핵안을 기각하면서도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은 분명히 경고했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공정한 선거가 실시될 수 있도록 총괄.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당연히 선거에서의 중립 의무를 지는 공직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특정 후보를 떨어뜨릴 의도마저 분명히 드러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생각해 보니 끔찍하다"고 했다. 특정 야당 후보를 겨냥해 "대운하에 제정신 가진 사람이 민자 투자하겠나" "한국의 지도자가 다시 독재자의 딸이라면…"이라고 조롱했다. 정권 교체를 '끔찍한 일'이라고 부정하는 대통령에게 어떻게 민주 헌법을 수호하고,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세계적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반칙과 변칙을 쏟아내면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그는 '참평포럼'의 선거 개입에 우려하는 여론에 대해서도 "남의 일에 시비 걸지 말고 자기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주장했다. '참평포럼'이 팬들을 모아 놓고 뭐라 자화자찬하건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선거에 끼어드는 건 별개 문제다. 하고 싶다면 당당하게 정당으로 등록하고 나서라.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라는 취임 선서로 임기를 시작한 대통령이 "그놈의 헌법이 못하게 하니까…"라는 말을 해도 농담으로 받아 줘야 하는가. '죽사발'이라느니 야당 원내대표가 '가관'이라느니 끝없이 쏟아내는 막말에 얼마나 많은 국민의 얼굴이 화끈거렸겠는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강력히 대응하지 않은 변명을 하며 "절제하는 가운데 신뢰가 구축된다"고 주장한다면 왜 같은 나라의 야당에는 그런 절제를 발휘하지 못하는가.

한나라당은 중립 의무와 사전 선거운동 위반에 대한 제소를 검토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대응이야말로 노 대통령이 바라는 바다. 마음대로 떠들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참기 어려워도 당분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리자. 이런 정권을 탄생시킨 우리 국민들도 그 정도의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