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토론, 계급장 떼고 정정당당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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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페어(fair)'하지 못한 스포츠는 이미 스포츠가 아니듯 정당하지 못한 토론은 토론이 아니다. 토론을 가장한 여론 조작에 불과하다. '기자실 통폐합' 방안에 대해 역풍이 거세자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토론을 제의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5공 청문회에서 스타가 됐고,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특유의 말솜씨로 재미를 봤다. 200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는 공직사회에 토론 활성화를 주문했다. 토론은 자신 있다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재임 52개월 동안 '대통령직'을 건 발언 못지않게 많았던 것이 공개토론 제안이다. 최근 1년만 보더라도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 반대자에 대해, 개헌 반대자에 대해, '기자실 통폐합' 반대자에 대해 "토론하자"고 했다. 노 대통령의 토론 제안이 한 번도 성사된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청와대 대변인이 '토론회의 TV 생중계'까지 거론하는 것을 보니 실행에 옮길 뜻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염려스러운 대목이 있다. 개인적 경험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하던 해인 2003년 9월 초 KBS의 심야토론에 나오기로 했었다. KBS는 현직 대통령의 토론 프로그램 첫 출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당 기간 청와대와 접촉했다. 토론자는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총장,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서강대 교수 한 분과 필자,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됐다. 세 차례 준비모임을 하면서 토론자들은 "토론자들이 묻고 대통령이 답하는 기자회견식이 아니라 진정한 토론이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청와대가 불편해할 만한 상당히 강경한 기조의 토론 초안이 마련됐다. "초안을 청와대에 줄 이유가 없다"는 토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KBS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라며 이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청와대는 토론회 2, 3일 전 전격 취소했다.

올 2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노 대통령이 참석하기로 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관훈클럽에 "개헌 문제를 절반 이상 다루자"고 했지만, 토론자들은 "토론회를 개헌 홍보의 장으로 이용하게 할 수는 없다"며 "개헌 문제는 '여러 현안 중의 하나'로 다루겠다"고 했다. 이 토론회 역시 불발로 끝났다. 토론회를 며칠 앞두고 청와대가 참석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보기에 질문 내용이 고약할 것 같아서, 토론 참석자들의 면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는 자신들이 의도한 홍보 효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토론회 직전에 불참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당시 정황이나 토론 주최 측이 전한 얘기를 종합해 보면 그런 의혹이 짙다.

사실 이 문제는 토론회를 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반대하고, 대다수의 대선 주자가 반대하고,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고 있다. 정권이 바뀐 뒤 원상 복구하겠다고 공약하는 주자가 늘고 있다. 기자실 통폐합은 강행해 봤자 예산만 낭비될 뿐이다.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부 언론사와 소수의 친노계열 대선 주자들도 찬성이 아니라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찬 전 총리 측은 기자들이 의견을 묻자 "이 전 총리가 이 문제에 대해 말한 게 없다"며 "노 코멘트라고도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대의도 아니고 대세도 아니라면 조용히 거둬들이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굳이 토론회를 하겠다면 정정당당하게 하라. 대통령이 그렇게 자신 있다면 계급장 떼고 하라. 그래야 국민들이 토론회를 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전제가 하나 있다. 토론회가 끝나면 바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