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일본의 정치윤리/이석구 동경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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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즘 일본은 연일 운송회사 도교사가와규빈(동경좌천급편)의 정치인에 대한 거액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시끄럽다. 언론의 추적과 검찰 수사로 사건의 진상이 이제 어느 정도 밝혀졌다.
가네마루 신(금환신) 전자민당부총재가 돈을 받은 것은 물론,자민당 총재선거때 폭력단에 의뢰해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전총리에 대한 우익진영의 비난을 중단시킨 사실도 드러났다.
가네마루는 지난달 도쿄사가와규빈으로부터 정치자금 5억엔을 받았다고 시인한뒤 자민당 부총재직과 다케시타파 회장직을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자민당 부총재직 사표는 미야자와 총재에 의해 수리됐으나,다케시타파 회장직은 그대로 갖고 있다. 그가 회장직을 물러날 경우 파벌자체가 분열될 가능성이 있어 파벌 전체가 그의 유임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일본의 「정치수준」을 알 수 있다. 정치인이 그것도 일본정치의 최고실력자가 실정법을 위반하고 폭력단과 깊은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자민당내에서는 그의 정계은퇴를 부르짖는 사람이 없다. 다케시타파는 물론이고 타파벌에서 조차 책임을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유권자들은 유권자들대로 지연·혈연·학연 등으로 끈끈하게 얽혀있어 정치인의 비리에 관대하다. 또 으레 정치는 돈이 들게 마련이고 파벌정치가 존재하는 한 돈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앞으로 선거를 치러봐야 알겠지만 과거의 예로 보아 가네마루가 선거에서 낙선하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야당도 아주 소극적이다. 철저히 추궁할 정보수집능력이 없는데다 정치자금에 관한 한 야당도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찰에 의해 폭력단과의 관계가 드러나자 비로소 야당은 가네마루의 퇴임을 거론하고 나섰다.
이처럼 일본의 정치는 돈과 깊이 얽혀있고 파벌 역학관계에 의해서 움직일뿐 정치윤리는 마비될대로 마비됐다. 파벌의 이익이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식견이나 자질보다는 자금력과 조직력이 좌우한다. 정치가 이런데도 일본이 발전한 것은 일본사회의 권력이 정계와 관료·재계에 분할돼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관료조직과 기업집단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탓이기도 하다.
『정치는 형편없으나 관료가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처럼 일본사회를 잘 대변해주는 말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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