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리그에서 뛰고 싶은가? 그렇다면 몸부터 돌아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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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16면

연합뉴스

프리미어리그는 숨이 막히도록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잠시만 멈칫하면 육중한 태클이 무릎과 발목을 엄습해온다. 깜빡 집중력을 잃었다가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살벌한 필드. 경기장의 잔디는 한국과 달리 질퍽한 느낌을 준다. 스텝이 잘못되면 근육통으로 번지기 일쑤다.

이탈리아ㆍ독일ㆍ스페인리그에는 없는 리그컵(※1∼4부 리그 팀 간의 토너먼트컵ㆍ‘칼링컵’으로 불린다)까지 소화하다 보니 유일하게 겨울 휴식기가 없는 리그. 단순히 경기에 출전해 뛰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매 경기 수만 명 앞에서 뚜렷한 결과를 남겨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박지성ㆍ이영표ㆍ설기현은 여기서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다 수술대에 올랐고 목발 신세를 지게 됐다.

2004년 유럽축구선수권에서 프랑스ㆍ잉글랜드ㆍ스페인ㆍ독일ㆍ이탈리아 등 거함들이 잇따라 무너지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활약도를 그래픽과 함께 분석했다. 공교롭게도 프리미어리그 스타들은 이름값을 해내지 못했다. 시즌을 치르는 동안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바닥난 것이다. 유럽 축구에서 가장 심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는 이들은 ‘혹사당하는 고액 연봉자’들이다.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차범근. 중앙포토

견뎌내야 프리미어리거다

기자는 영국 출장 중에 설기현의 수술 소식을 들었다. 설기현은 오른쪽 무릎 연골 재생술을 받은 박지성과 왼 무릎 인대를 접합한 이영표에 이어 세 번째 수술대에 오르는 한국인 프리미어리거였다. 안타까웠다.

유로스포츠의 애덤 마셜 기자를 만났을 때 “프리미어리그 일정이 너무 타이트해 부상자가 속출한다”고 의견을 말했다. 마셜 기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게 프리미어리그다”고 대답했다. 그는 “잉글랜드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잘 적응돼 있지만 다른 나라 선수들은 힘들어 한다”면서 1년간 적응기를 거쳐 정상에 오른 코트디부아르의 디디에 드로그바(첼시)와 바이에른 뮌헨(독일)에서 펄펄 날다 프리미어리그 입성 첫 시즌에 발목을 다친 독일의 미하엘 발라크(첼시)를 예로 들었다.

수비 때 딜레이 플레이(상대 공격을 지연하기 위해 간격을 두고 쫓아가는 것)를 즐기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리그에 비해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은 잉글랜드 축구 속어로 ‘개싸움’으로 불리는 몸싸움을 즐겨 한다.

외국인 선수로 살아남는 법

철의 장막 같던 맨유의 훈련장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부상으로 1군에서 제외된 박지성의 사물함에는 유니폼 대신 태극부채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훈련장에는 긱스ㆍ스콜스ㆍ퍼디낸드ㆍ루니ㆍ호날두가 보인다. 이들 틈에 크리스 이글스와 중국의 덩팡저우가 끼여 있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는 화기애애함 속에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맨유 유소년 출신인 이글스도 잔뜩 얼었다. 덩팡저우가 실수를 반복하자 갈라지는 듯한 “떵”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박지성에게도 2년 전에는 이런 시간이 있었으리라.
마셜 기자는 “프리미어리그는 실력 있는 선수에게는 국적을 묻지 않는다. 건강과 몸 상태도 스스로 책임져야 할 실력 중 하나다”고 말했다. 냉혹하긴 하지만 실력이 시비를 잠재울 만병통치약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차붐의 위대함

‘훈련이 명인을 만든다(Uebung macht den Meister)’는 독일 속담이 있다.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시절 체조를 즐겼다. 레버쿠젠의 감독으로 ‘토털 사커의 창시자’로 불리는 고 리누스 미헬스 감독으로부터 전수받은 이 특별한 체조는 ‘훈련ㆍ연습’을 뜻하는 ‘위붕(Uebung)’ 가운데 하나였다. 근력과 지구력, 순간 폭발력을 키우는 데 탁월한 효과를 낸다고 한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GK인 야신도 이 체조를 즐겨 했다고 한다. 선수 차범근은 경기 전ㆍ후는 물론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체조를 함으로써 부상을 예방했다. 1980년 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뛸 때 바이엘 레버쿠젠의 수비수 위르겐 겔스도프의 악의적인 백태클로 ‘제2 요추 골횡 돌기부 골절’을 당한 것이 10년 동안 독일에 머무르면서 입은 유일한 큰 부상이었을 만큼 그의 성실함과 준비성, 부상에 대한 대비는 완벽했다. 

몸속에 ‘폭탄’을 숨긴 선수들

많은 한국 선수가 몸속에 부상의 가능성을 숨기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혹사당한 탓이다. 이동국ㆍ고종수 등 이른바 천재로 불렸던 선수들은 20대 초반에 이미 무릎이나 발목을 수술하고 재활에 시간을 투자하는 바람에 선수 생명의 절반을 까먹었다. 그나마 잔부상이 없다던 박지성ㆍ이영표ㆍ설기현마저 독일월드컵이 끝난 뒤 쉬지 못하고 맞이한 시즌 막판에 탈이 나고 말았다.
한국축구가 보다 많은 빅리거를 보유하며 발전하려면 혹사를 막을 시스템부터 교체해야 한다. 웬만하면 참는 버릇이 큰 병을 만들기도 한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이

‘조금 아프다’고 말하면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인내심이 상당한 선수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거로 롱런하려면 이제 참아서는 안 된다. 철저히 준비하고 방지해야 하는 것이 부상이다. 프리미어리거 3총사는 부상과 수술이라는 시련의 구렁텅이에서 일어서 희망의 이야기를 다시 준비하고 있다.
결론은 이렇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마음껏 뛰고 싶은가? 그렇다면 몸껏(?)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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