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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바다, 신판 해적이 날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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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할리우드의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들 3편-세상끝에서’가 세계 영화 시장을 흔들고 있다. 피터 팬의 후크, 보물섬의 실버, 캐러비안의 잭 스패로 선장까지 바다의 용감무쌍한 도적들 이야기는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소설과 영화의 단골소재로 등장해 왔다. 하지만 해적의 발호는 과거가 아닌 21세기 초반 현재 상황이다. 지난해 4월 한국의 참치잡이 어선 동원 628호가 소말리아 해적들에 납치당했다 117일 만에 풀려난 지 1년이 안 돼 지난달 15일 우리 선원 4명이 탄 어선이 또 소말리아에서 납치됐다. 며칠 뒤 소말리아 주민들을 위해 식량을 운반하던 유엔 세계식량기구(WFP) 선박까지 해적의 공격을 받았다.

▶쾌속정, 로켓추진수류탄 무장

“5월 25일 새벽 3시15분 말라카 해협. 쾌속정이 유조선 후미로 접근 시도, 무인 순찰선에 의해 발각돼 경고받고 도주. 인근 선박 주의 요망.” 해적활동을 감시하는 국제해사국(IBM)의 해적신고센터(PRC)가 해적 사고를 실시간 접수해 인도양ㆍ대서양ㆍ태평양 선박들에 알려주는 주의보. 2~3일에 한 번 꼴로 새로운 사건이 업데이트된다. 기원전 13세기부터 존재했다는 해적의 현대 후손들은 이제 해골이 그려진 해적 깃발을 달지도, 칼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로켓추진수류탄, 권총, 휴대전화, 감청기구 등 첨단장비로 무장하고 닻을 내리거나 속도를 줄인 선박을 탈취한다. 칼이나 몽둥이ㆍ갈고리 등 ‘원시적’ 장비로 선원들을 위협해 소지품이나 배 안의 금고를 터는 ‘생계형’도 여전히 많다. 승무원들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는 것은 최근 늘고 있는 유형이다. 해적으로 인한 피해액은 매년 전 세계적으로 13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 1995년부터 2006년까지 해적의 공격으로 사망하거나 실종한 사람은 공식 집계로만 532명에 이른다. 선박들의 해적 방어 기술도 진보하기는 마찬가지다. IMB는 해적들의 승선을 막도록 선체 외벽에 9000V 전기가 흐르게 하는 장비 설치를 권유하고 있고, 해적출몰 지역 나라들은 위성추적 시스템, 자동항해 무인로봇 순찰선 등을 이용해 해적 단속에 나서고 있다. 압축음파를 발사해 해적들의 청각을 손상시켜 선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첨단 장거리 음향무기(LARD )를 장착하기도 한다. 2005년 11월 소말리아에서 해적들의 공격을 받은 호화유람선 시본 스피릿 호의 경우 이 장비를 이용해 해적을 물리쳤다.

▶말라카해협, 소말리아 해역 집중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말레이시아ㆍ싱가포르에 인접한 길이 900여㎞의 말라카 해협은 해적들의 천국으로 불리고 있다. 매년 5만여 척(세계 물동량의 25%)의 상선들이 이용하는 이곳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다. 한ㆍ중ㆍ일 3국이 이 해역을 통해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한다. 반면 좁고 수심이 얕아 선박들이 저속운항을 할 수밖에 없다. 외국 선박을 노리는 해적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의 바다. 98년 말라카 해협에서 실종된 화물선 텐유호는 석달 후 산에이 1호란 이름을 단 채 중국 항구에서 발견됐다. 말라카 해협을 비롯, 아시아 해역에서의 해적 사건 발생 건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이 지역이 전체 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높다. 지난해 발생한 239건 가운데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50건, 말라카 해협 11건, 방글라데시 해역 47건, 말레이시아 10건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소말리아ㆍ나이지리아는 10건ㆍ12건으로 이들 지역은 2000년 이후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통제권이 없는 빈곤지역 아프리카 동서부 실상의 반영이다. 두 차례에 걸친 한국 선박의 피해도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IMB는 소말리아의 경우 해안선에서 200마일 이상 떨어져 항해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전체적인 해적 사고 건수는 2003년 445건으로 정점에 오른 뒤 2004년 329건, 2005년 276건, 2006년 239건으로 조금씩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신고되는 해적 피해 건수는 실제의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려되는 해상의 9ㆍ11

9ㆍ11 테러 발생 1년 6개월이 지난 2003년 3월. 말라카 해협에서 기괴한 사건이 발생했다. 액화천연가스를 가득 실은 듀이 마드리드 호가 해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해적들은 배에 실린 화물이나 승무원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항해사로부터 듀이 마드리드호 운항법, 그리고 그 배와 다른 크기의 배를 모는 법을 배우는 데 열중했다. 정박하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기술 정보를 담은 매뉴얼 책자만 가져갔다. 이 사건 발생 후 알카에다 조직이 액화천연가스 수송선을 주요 항구나 선박밀집 해협에 충돌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퍼져나갔고 실제 각국 해경은 자국 선박들에 주의보를 내렸다. 9ㆍ11 테러범들은 플로리다 비행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뒤 비행기를 납치해 직접 몰고 뉴욕 무역센터로 돌진했다. 해적들이 배 안에서 한 행동이 9ㆍ11테러범들을 연상시킨 것이다.

말라카 해협의 해적 출몰 감소는 국제적인 협력 분위기 덕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말레이시아ㆍ싱가포르 등 3국이 국제사회의 압력과 지원 속에 해적 단속을 강화하고 있고, 인근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한국ㆍ일본 등 해역 이용국의 합동 해적 단속 훈련도 정례화하고 있다.

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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